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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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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벅? 머리 잘랐으면 말을 하지. 표정은 왜 그렇게 험상궂게 굳어져 있어?
bu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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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매일이 약에 취한 듯 스티브 로저스란 모양의 환각을 달고 산다지만 이제 목소리도 들리는구나 싶고.) 머리 자른 날부터 얼굴 일그러지더니 얼마나 불만이었으면 말도 해?
ste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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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을 잡으려다 반지가 없는 걸 발견하고 눈을 깜빡였다.) 어? (고개를 들어 찬찬히 인상을 톺았다. 자신이 기억하는 '버키 반즈'보다는 조금 더 지쳐 보였지만. 좋게 말하자면 산전수전 다 겪고 무언가 놓아버린 듯한 표정이었고, 나쁘게 말하자면……. 팔은 새 건데 얼굴이 헐었네.) 아깝잖아. 나름대로 잘 어울렸는데. (아무렇지 않게 의수를 잡아당겨 어깨를 감싸안곤 곁눈질로 반응을 살폈다.) 그러고 보니 어쩌다 잘랐더라.
bu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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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하네. (언제나 시야의 가장 외곽에 자리해 있던 그가. 곁눈질로만 시선이 닿는 데다가 그마저도 의식하여 무시하던 그가 저를 정면으로 마주하고 있음을 깨달으면 고개 옆으로 기울어지고.)
bu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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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날씨가 더워져서 잘랐잖아. (스티브의 형상을 한 이방인이 제게로 손을 뻗어오면 움찔 물러나려는 상체 붙들어두고. 너 누구야, 하고 튀어나가려는 물음은 혀를 지근지근 씹어 참았다.)
ste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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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한테 허락도 안 맡고? (그럴 리가 없는데. 일거수일투족은 물론이고 일상의 모든 부분을 제게 일임하다시피 한 마당에. 손끝만을 움직여 바짝 굳은 손목 안쪽을 가볍게 훑어내렸다. 수갑으로 인한 멍 자국도, 목이 졸린 자리에 으레 남는 액흔도 부재했다. 내가 아는 '버키'가 아닌 건 확실하고.)
ste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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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억이 지워진 것 같진 않고. 이 경우엔……. (조금 냉소적으로 변한 낯에 대고 차분히 미소를 띤 채 입을 열었다.) 내가 널 만지는 게 싫어? 나잖아. 벅. 네 친구인 스티브 로저스.
bu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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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락을 구하기엔 넌 내 곁에 없었고 빌어먹게 망가진 뇌가 만들어낸 네 형상만 입을 뻐끔댔는데. 손목 안쪽 움푹 팬 자리를 더듬어 내려가면 사람 온기에 굶주린 살점이 그 지문에 들러붙는 듯해 속이 메스꺼워진다.)
bu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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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애 얼굴을 베껴 달 만큼 뻔뻔한 것 치곤 소식이 느리네. ("캡틴 아메리카는 달에 갔어, 못 들었어?" 입꼬리 삐뚜름하게 끌어올리고 손 뿌리쳐낸다.)
ste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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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한 세기 동안 친구로 지내다 보면 눈빛만으로도 서로의 내면이 훤히 보이기 마련이었다. 적어도 '달에 갔다'라는 표현은 문자 그대로의 의미는 아닐 것이며, 상처 입은 짐승처럼 저를 경계하는 반응은 꼭. 실연이라도 당한 듯 위태로워 보였고.) 너만 여기 두고? ……왜?
ste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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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팡질팡하던 손끝이 주먹을 꽉 쥐며 멈추었다. 어깨를 짓누르던 혼란을 털어내듯 고개를 곧게 세우고, 굳게 다문 턱끝에 힘이 들어가는 것과 동시에.) 버키. 나 똑바로 봐. (발걸음을 내디뎌 단숨에 간격을 좁혔다. 꿰뚫을 듯한 시선이 정면을 향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얘기해 줘.
bu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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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긴 왜야, 꿈을 이루러 갔지. (배너 박사가 장황하게 늘어놓은 설명의 구할 정도는 알아듣지 못하고 흘려보냈지만 그 순간 직감한 것은 이 임무를 완수한 스티브가 다시 돌아오지 않으리란 사실이었다. 때문에 초를 다 세는 것을 기다리지도 않았으며.) ...... 왜? (꿈이 아니라면 제 일그러진 정신이 만들어낸 망상의 파편 속을 살고 있는 것일 테고 제가 왜 판타지 속에서도 곪은 상처를 헤집어대야 하는지. 취하지 못하는 몸뚱이를 가지고서도 하루의 반절 쯤은 제정신을 놓은 채로 나머지 반절은 끔찍하게도 제정신인 채로 그렇게 지내는 와중에 눈앞의 낯익은 이방인은 전자에 찾아왔다. 때문에 비실비실 웃어대며 휘청거리다 그 날카로운 시선으로부터 등을 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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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망스럽기는. (언젠가 로스 장군에게 말했던가. '저는 과거의 영웅입니다. 제가 죽거나, 더는 싸울 수 없게 된다면 대중에게는 집으로 다시 돌아갔다고 전해주십시오.' 전장에서 죽는 것을 목표 삼아 부유하다가, 과거이자, 자신을 증명할 유일무이한 존재인 그를 만나 살아갈 이유를 찾았고. 그런 내가, 친구의 고통과 현실을 저버리고 기어코 저 밑바닥에 처박혀 있던 낡은 도피처로 떠났다는 거지. 미래에 홀로 던져져 살아가는 게 얼마나 끔찍하리만치 외로운지 알면서도. 스티브 로저스, 이 개자식아.) ……네 친구가 울고 있잖아. 온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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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 나아가야 한다고 잘난 듯 연설할 자격도 없어. 도망친 주제에.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두 팔로 허리를 감아 뒤에서 끌어안고 있었고.) 가지 마. 벅. (폐부가 떨릴 정도로 격렬한 열기를 삭히느라 잠시 호흡을 골라야 했다.) ……그 비겁한 자식 어디 있어. 죽었다고 해도 다시 죽여버릴 거야.
bu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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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망이라는 단어엔 심장이 저 아래로 떨어지는 듯해 숨을 몇 번이고 다시 들이켜야 했다. 미래에 남겨져 살아가야 할 이유는 그가 저를 살렸음 그 하나 뿐이었으니까. 네가 날 구한 걸 후회하면 나는, 나는. 호흡을 가다듬느라 아득해졌던 의식이 돌아올 즈음에는 이미 단단한 품에 갇힌 채였고, 이 몸은 스티브 로저스의 품을 떨쳐내는 법은 몰랐기에......) ...... 그렇게 말하지 마. 네가 뭔데 걔를 욕해? (본능에서 뻗어나간 모든 선이 그가 스티브 로저스임을 가리키고 있었지만 여전히 그를 낯선 이로 대하는 것은 그렇게 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기에. 내가 어떻게 너를 보냈는데.)
bu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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놔, 이거. (얕은 몸부림으로 마른 배 위를 단단히 결박한 두 팔은 떨어질 리야 없으나. 혼자 지낸 지 오래라 쓸 일 없었던 음성이 마구 쉬어버린 채 뱉어져 나온다.)
ste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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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니면 누가 캡틴 아메리카에게 침을 뱉고 욕하는데? (모든 걸 잃은 그에게 남은 거라곤 청산할 죗값뿐인 걸 뻔히 알면서. 터져 나오려는 비명을 삼키듯 주먹을 악다물었다. 살점이 눌리는 날카로운 통증 뒤로 이내 둔한 작열감이 뒤따랐다. 다만 육체의 통증이 마음의 난도질보다 나아서.)
ste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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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널 아끼고 사랑한다면 그래선 안 되지. (매번 주제 파악도 못 하고 달려들던 녀석을 구한 게 누군데. 밤새도록 열에 들떠 죽어가던 녀석을 간병하고 보살피던 게 누군데? 책임을 등지고 도망가면 페기 카터가 퍽이나 반기겠다. 기어코 몸을 돌려 저를 마주 보게 만들곤 손을 올려 물기 어린 뺨을 짚었다. 그러고 보니.) '나'는 네게 사랑한다고 말했어?
bu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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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명한 푸르름을 마주하자마자 그 색에 마음을 빼앗긴 듯 멍하니 바라보다 '사랑'이란 말에 헛웃음 새어나온다. 갈 때까지 갔구나, 제임스 뷰캐넌 반즈. 꿈인 모양이다, 아직도 더러운 욕심을 놓지 못해 꿈에서도 그가 발음하는 사랑 그 혀 움직이는 모양새로 자위하는 모양이었다.) ...... 만지지 마. (네가 자꾸 나를 만지면 내가 이 환상에서 깨어날 마음을 먹지 못한단 말이야. 스티브 로저스의 형상을 한 그의 손바닥에 물기 묻어나는 것을 흐리멍덩한 눈으로 따라간다. 울고 있었던가, 내가. 몸을 물려 비척비척 집 안을 돌아다니는 걸음걸이에는 나름의 목표가 있었다. 휴대폰 단축번호 1번에 저장된 샘 윌슨에게 음성메시지를 남기고, 와칸다의 공주가 건네 준 약이나 통으로 삼키고서 잠수를 탈 요량이었고. 매트리스 없이 바닥에 깔린 이부자리 틈에서 휴대폰을 찾아 그를 돌아보면 회색 눈은 완전히 지쳐 흐리게 잠긴 채였다.) ...... 아직도 있네.
ste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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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할 거면 제대로 해야지. 네가 거리 둬 달라고 하면 멀리 떨어져 주고, 놓아달라고 하면 곧이곧대로 손을 놔 주는 건 네 친구 아니거든. (말 잘 듣는 자신과 친구를 두고 간 자신 중 어느 쪽이 더 최악인지 가늠하다가 미간을 찌푸렸다. 루마니아에서 도망 다닐 때도 매트리스는 있었어, 임마.) 소파도 있으면서 바닥에서 자는 건 대체 무슨 생각이야, 응? (손을 뻗어 단말기를 가져가 자연스레 연락처부터 확인했다. 제 이름은 어디에도 없고, 샘 윌슨과, 상담사로 추정되는 레이노어라는 이름이 다였고. 나타샤가 없네, 그러고 보니. 고개를 돌려 온기라곤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실내를 살폈다. 불조차 켜지 않아 제가 홀로 지내던 아파트보다도 적막한 광경. 다른 침구를 둘 만한 가구는 보이지 않았다. 보란 듯 옆에 앉아 맨 살갗이 드러난 어깨를 주물렀다.) ……혹시 네가 날 찬 건 아니지?
bu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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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 바야? (괜히 음성을 날카롭게 벼려 내보내는 것은 그렇게 하면 이 끔찍하면서도 사랑스러운 환상이 사라질까 싶어서. 널부러진 이불자락의 각을 잡고 있자면 손 뻗어 휴대폰을 가져가는 걸 따라가고. 환영이어야 하는데. 네가 진짜면 안 되는데. 물리적인 접촉과 물건의 조작이 가능한 환영도 있던가?) ......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자꾸. 우린 아무 사이도 아니었어. (나는 너에게 과거에서 미래로 날아온 짐일 뿐이었고. 스티브 로저스의 세상은 혈청을 맞은 이후로 서서히 넓어졌고 그 확장된 시야에 단 한 사람이 없음이 그를 불행하게 했다고. 그리고 그 사람은 내가 아니었어, 스티브. 휴대폰 빼앗아선 샘 윌슨의 번호를 누른다. 그에게 음성 메시지를 남기는 어투는 꽤나 친근한 데다 세상에 유일하게 남은 '제 편' 에 대한 애정이 담겨 있었다.) "샘, 지금 내 집에 스티브가 있는데, 이게 진짜인지 모르겠고. 진짜면 어디서 온 건지 모르겠으니까 원래 자리로 돌려보내야 돼, ......"
ste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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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닿았을 때 감촉은 방패와 흡사했는데. 가볍고, 서늘하고, 진동이 거의 없는. 티타늄에 비해 자연스러운 의수의 움직임을 유심히 관찰하다가, 전송 버튼으로 엄지가 움직이기도 전에 가볍게 제지하며 고개를 가로저어 보였다.) 난 샘을 믿지만, 지금은 널 두고 다른 사람이랑 얘기 나누고 싶지 않아. 널 보러 왔으니까, 벅. (그가 저 말고 다른 사람에게 의존하는 모습에 묘한 감정을 느낀 탓인지. 저도 모르게 목소리엔 힘이 들어가 있었다. ) 나도 널 만난 건 꽤 오래간만이란 말이야. 네 얘기부터 들려줘. (빈틈 없이 정리된 이불을 손으로 짚은 채 검지로 작은 수첩을 가리키곤,) 상담 일지야?
bu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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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주제에 흉내는 잘 내내. (아주 오래 전의 스티브는 자신이 새로이 누군가와 가까워지거나 여자 친구를 사귀는 것을 영 못마땅해했고. 어린 시절 자신은 그것을 질투로 착각해 홀로 설레발을 치기도 했으니까.) ...... 내가 지금 너와 얘기 나누고 싶지 않다면? (속을 후벼파면 저 낯이 일그러지며 이 환상도 사라질까. 만질 수 있는 걸 보면 시간의 틈을 타고 외딴 곳에 떨어진 다른 세계의 스티브인가 싶고.) 오랜만이라고? 왜, 그 쪽 세상 나는 죽었어? (부럽네, 하고 나직이 중얼거리며. 스티브가 남기고 가 제가 사용하던 수첩에는 이름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봐도 좋다며 손짓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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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답할 가치가 없는 질문은 적당히 흘려듣고는 익숙한 노트를 집어 들어 팔랑팔랑 넘겼다. 앞장까진 제가 적어 둔 플레이리스트와 영화, 21세기에서 그에게 소개하고 싶었던 것들이 빼곡했지만. 뒷장에 적힌 이름들은 아마…….) 이렇게 쓸 줄 알았으면 안 줬어. 벅. (길을 잃지 않길 바라고 건넨 걸 텐데, 기억에 남기고 싶은 게 죄책감뿐이냐고. 책망하듯 응시하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네 여동생 이름은 레베카고, 넌 우리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 나한테 같이 살자고 제안했어. 몇 번 거절해도 포기할 줄 모르고 종종 남의 집에서 주정 부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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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로 하기 싫으면 몸으로 얘기해야 알아듣나? 아무렇게나 늘어진 오른 손목을 제 쪽으로 당겨 고개를 묻었다. 이내 열린 입술 사이로 뜨겁고 축축한 혀가 미끄러져 나왔다.) 넌 날 처음 만난 그 순간부터 사랑했다고 했어. ……처음 키스하는 법을 가르쳐줬을 때. (손금 하나하나의 신경을 자극하듯, 건조한 입술을 손바닥의 굴곡을 따라 세밀하게 움직이다가,) 섰다고 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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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 말 없이 건네 놓고는 어떻게 쓰라는 건지 내가 어떻게 알아. ('내가 돌아올 때까지' 로 다음을 기약해 놓고는 결국 돌아오지 않았던 그에 대해 남은 감정이 원망인지 혹은 체념인지 모르겠으나. 책망하는 투에는 발끈할 수밖에 없어서 자꾸만 모난 소리가 튀어나왔다.) ...... 허, 너. ("네 어머니는 사라 로저스였고 넌 신발에 신문지를 깔창 삼아 넣고 다니곤 했지," 그 때의 자신처럼 서로만이 아는 옛 기억으로 저를 동하게 만들려는 심산이겠지만 그의 얼굴을 똑같이 베껴 놓은 이상 의심할 수 밖에 없었고, 아니, 사실은 계속해서 의심하고 싶었고. 네가 정말 스티브 로저스라면 네 부재를 인정하기까지 걸린 그 긴 시간이 수포로 돌아가니까. 손목에 입술이 닿고, 마치 프렌치 키스를 나누듯 혀가 옴폭 팬 골 사이로 밀려 들어가면 척추가 저릿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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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 ...... (그대로 손목을 뿌리치고 그를 벽면으로 밀어붙인다. 내가 아직도 금발에 파란 눈이면 몸부터 달아하고 보는 개새끼인 줄 알아? 얼굴만 같으면 대줄 줄 아냐고, 그렇게 날을 세우려다가, 저를 바라보는 그 파란 시선에 꼭 옛날 뇌가 지져지던 그 고통이 돌아오는 것 같아서.) ...... 왜, 왜 왔어?
ste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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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멱살을 잡힌 채 벽에 뒤통수가 세차게 부딪혔지만, 일말의 저항 없이 뺨과 하악이 경련하는 낯을 올곧게 응시했다. 한 박자 늦게 그의 손에서 미끄러져 바닥에 떨어진 단말기를 구둣발로 지그시 덮어 눌렀다. 이 눈빛 속에 제 온전히 존재한다는 사실이 숨이 막힐 만큼 벅차올라서.) 보고 싶었거든. (무척이나. 꼭 죽지 못해 살아난 시체처럼 생기 없던 그의 표정이, 분노와 동요로 얼룩진 게 전부 제 탓처럼 느껴져서. 그의 모든 억하심정의 방향이 오롯이 제게로 향한다는 사실에 흥분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고. 턱을 쥐고 열려 있는 입술 틈으로 칼을 찔러넣듯 혀를 깊숙이 처박아 얽었다. 명치 끝에서부터 울컥 치밀어 오른 열기를 잘게 내뱉고 나서야 빙그레 웃곤,) 네가 죽었냐고 물어봤지?
ste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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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맞아. 내가 죽였는데. 계속할까?
bu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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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야 여기저기 붙였던 탓에 닳고 헐은 입술이었다지만 얼음에서 몸과 정신이 모두 깨어난 이후에는 스티브와 어깨 맞붙인다든가 손바닥 잠시 스친다든가 하는 것 외에 이렇다할 신체 접촉은 없었고. 때문에 뜨거운 입술이 포개어지고 두툼한 혀가 제 입 안 누벼대는 것은 제임스 뷰캐넌 반즈를 이루는 어떤 본질적인 외로움을 건드렸다. 주제에 사랑받고 싶어하는 그 욕심을.) ...... 그거 망가뜨리면 안 돼. (상담사의 연락에 응하지 않거나 면담에 늦으면 꼼짝없이 감옥행이다. 선심 쓰듯 조건부 사면이란 이름 아래 국가가 저를 묶어놓았음을 알게 되면 제가 아는 스티브 로저스는 분명 분노할 테니 별다른 설명 내놓지 않고 몸 굽혀 그의 발아래 액정이 깨지기 전에 휴대폰 줍고. '샘과의 연락' 을 우선시하는 것으로 오해한다면, 하라지 뭐.) ...... 네가 죽였다고. (상체를 펴 그를 마주하는 회색 눈의 소용돌이는 잦아든 채였다.)
bu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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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럼 나도 좀 죽여줘.
ste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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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시당하고 있어? (곤란하네. 이 집에도 도청기 같은 게 붙어 있을 거 아니야. 연락하는 이가 별로 없어 보여서 다행이라 생각했는데. 포기할 줄 모르고 휴대전화를 빼앗으려 들면 기어코 그의 손등을 감싸 쥐어 손아귀째 으스러뜨렸다. 바스라진 액정과 배터리에서 흘러나온 액체가 쏟아져 내렸고.) 나 화나게 해서 좋을 거 없거든, 벅. 널 도와주러 온 사람한테 그러지 마. (당장은 공격할 것처럼 보이진 않고. 독한 진정제 덕분인지 원체 말도 안 되는 상황을 연달아 겪어 현실 감각이 무뎌진 덕인지. 떨어지려 들면 오히려 매달리듯 안겨 오는 모양새에 어깨를 다독이며 소파에 천천히 앉혔다.)
ste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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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가 안 가네. (널 왜 두고 갔지? 죽고 싶어질 정도로 괴로워할 걸 모르지도 않았을 텐데.) 너만 살인자라서? 첫사랑에 넌 방해가 되니까? 적어도 난 그런 이유로 널 혼자 두진 않을 거야. 그래도 여전히 죽고 싶어? 없는 사람끼리 서로 필요한 걸 찾으면 안 되나? (나란히 앉아선 비브라늄 팔 위를 검지로 규칙적으로 건드리다가, 손을 올려 까끌까끌한 턱을 만지곤 초점 없는 눈을 응시했다.) 난 널 못 지켰어.
ste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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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베리아에서.
ste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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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널 되찾기로 했고, 가장 빠른 방법은 세상을 통제하는 거였고. 질문 있어?
bu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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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아. (감시 같은 걸 당하는 게 아니라고 말 떼려는 순간 손등 짓눌리는 고통에 턱이 힘없이 떨어진다. 스티브 로저스가 버키 반즈를 떠날 리 없다는 믿음 후에 또 하나의 믿음이 깨지는 순간이었다. 그가 저를 아프게 할 리 없다는. 약간 그 이상의 배신감이 서린 회색 눈에 고였던 물기는 떨궈지지 않고 충혈된 흰자위 위에서 말라붙었다. 손등과 손마디 뼈가 부러지며 쥐었던 휴대폰은 당연히 바스라졌고.) ...... 몰라, 안 물어봤어. (저를 달래는 다정한 낯에서 읽히는 기시감은 그가 '시베리아' 에서 다른 결말을 겪어 생긴 또다른 스티브이기 때문이었나. 외견을 별로 따지지 않던 제 스티브와 달리 멀끔한 정장 차림에 머리까지 반듯하게 넘기고 온 것에서 그가 말하는 '통제'를 이해하고. 비브라늄 손가락으로 손등의 뼈가 어긋난 곳을 누르면 순간의 통증이 잠깐이나마 저를 현실로 되돌려 놓았고, 그제야 이 상황이 실재함을 인정했다.)
bu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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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 설명대로라면, 네가 찾을 수 있는 '버키'는 나 하나가 아닌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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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죽이고, 다른 애 찾아가. 덜 망가진 애가 있을 거야.
ste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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싫어. 그러고 싶지 않아. (생각해 봐, 덜 망가진 네가 날 반길 리 없잖아. 현관 구석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왼쪽 눈가를 잠시 일그러뜨렸다. 만약 정말로 감시 카메라가 있다면 꽤 기묘한 장면이 펼쳐져 있겠지. 달에 갔다던 영웅이 다시 나타나 오랜 친구와 아무렇지 않게 대화나 나누는 광경이란. 고통에 익숙하다는 듯 뼈를 맞추는 모습엔 가볍게 혀를 차며,) 나한테 명령해도 된다고 허락 안 했는데. 그 팔은 누가 달아준 거야? 샘이랑 많이 친해졌어? (친구 많아 보여서 보기 좋네. 아차, 동기를 부여해야 제대로 답하던가. 영 협조적이지 못한 태도엔 적당한 협박이 필요할 테니까. 갈무리가 덜 되어 돌출된 손등뼈를 눌러 맞추자 경쾌한 딱, 소리가 퍼졌다.) 마저 대답 안 하면 네 상담사부터 죽일 거야.
bu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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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메라 없어. (시선이 어디로 향하는지 무엇을 찾는지 바로 알아채는 건 그 역시 스티브 로저스이기에. 그의 새파란 눈이 어떤 감정을 내비치며 그 걸음이 어디를 좇는지 한평생 그것만 헤아리며 살았기에. 때문에 이제는 가늠하고픈 의미 없이 죽지 못해 사는 것일 테고.) ...... 와칸다에서 달아 줬어. (대답하지 못할 질문들은 아니었기에 마지못해 다물린 입을 열었다. 꼭 단어 하나하나 발음하려 혀를 움직이는 것조차 진을 다 빼놓는다는 듯 지친 얼굴로. 손등의 어긋난 뼈가 우악스레 맞물려도 고통에 찬 신음도 표정의 변화도 없이.)
bu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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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까지 와서 깨달은 게 없어? (모든 게 최선의 시나리오대로 흘러가 네가 나를 구하는 데에 성공한 미래에 너는 없다는 것에서. 결국 너는 나의 부재에만 나를 갈구한다.)
bu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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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 날 사랑하는 게 아냐.
ste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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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칸다라면 그 최빈국? (위성 상으로 꼭 지구로부터 도려내진 것처럼 보여서 신경 쓰였는데. 클로의 밀수 덕분에 광산이 숨겨져 있을지도 모른다고 추측했고. 예상이 맞았네. 심사를 뒤트는 발언엔 도무지 생각이 유하게 흐를 리가 없었다.) 자꾸 이러면 대화하기 전에 먼저 데려갈걸 그랬다고 후회하게 되잖아, 벅.
ste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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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르듯 눈가를 만지다가 손안에서 굴리던 테이저 디스크를 의수의 팔꿈치 관절부에 부착해 엄지로 밀어 눌렀다. 전기가 통하는 건 비슷하네. 신경 스냅스를 대체할 수단은 못 찾았거나, 기술이 그것밖에 안 되는 거겠지. 디스크의 고정핀이 외피를 뚫고 서보모터에 밀착해 경련을 일으키는 동안 차분히 어깨를 감싸 시선을 맞추곤,) 너 말고도 그런 소리 많이 했지. 페기 카터도 그랬고. '반즈의 선택을 존중해라.' '정신 차려라.' '당신 친구가 원한 건 복수가 아니었을 거다. 하이드라의 이름을 내거는 건 더더욱 아니었을 거고.' 뭐 그런 소리. 알 바야. 걔네가 뭘 아는데.
ste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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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난 사랑도 아닌 것 때문에 외로워 했고, 펑펑 울었고, 비참했고, 죽고 싶기까지 했다고. 그러니 아직도 목 언저리에서 출렁대고 있는 이 욕망을 과연 무어라 부를 것인지 묻고 싶었다. 백번 양보해서 네 말이 사실이라 치자. 그럼, 지금부터 사랑하면 되는 거잖아.) 벅. 사랑해. (소파 등받이에 몸을 떠밀곤 숨 막힐 정도로 쇄골을 힘주어 누른 채 도로 입술을 포갰다.) 나랑 같이 가자. 너도 이런 세상에선 살고 싶지 않잖아.
bu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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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기계의 형식을 벗어나진 못했지만 물건을 다루기 쉽게끔, 그리고 무기가 아닌 인간의 신체 일부로써 기능할 수 있도록 연결해 둔 와칸다의 공주가 신이 나서 설명한 대부분의 내용을 이해하지 못했다지만 팔에 디스크를 부착하면 그 전류가 머리까지 울려 그 두통에 인상을 일그러뜨린다.)
bu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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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이드라의 이름을 내걸었다고. (자신의 선택을 존중할 필요는 없다. 자신은 스티브 로저스의 삶에 일종의 부록 같은 것에 불과했고 그런 건 뜯어낸다 해서 그 어떤 문제도 되지 않는다. 하지만...... 제 정신을 짓밟고 몸뚱이를 진창에 굴린 조직의 이름을. 원망이 짙어지며 눈동자의 색은 더욱이 죽어간다. 그럼에도 미지근한 입술을 오므려 틈새로 숨을 불어넣고, 혀를 진득하게 얽으며 키스하는 건.) ...... 사랑해, 스티브.
bu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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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너와 갈 수 없어. (죽지 못한 이유는 스티브 로저스가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 남아서, 살아가라는 명령을 내렸기에. 그가 남긴 수첩에 빼곡히 적어둔 이름은 이기적이게도 속죄보다는 생존을 위한 수단에 가까웠다. 자신을 삶에 붙들어 두는 건 자책감과 책임감이기에.)
bu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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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나는 다시는 하이드라의 세상에서 살고 싶지 않아.
ste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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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지, 버키. 내 세상이라고 봐야지. (남은 기술과 사상을 활용했을 뿐이지, 전부 내가 선택한 일이니까. 바깥에서 묻어온 차디찬 공기가 열에 들뜬 더운 호흡과 섞여 들었고, 혹여 혀를 깨물 것을 대비해 마디가 도드라진 손으로 허벅지를 뭉근히 쓰다듬으며 턱을 들어 제 얼굴을 바라보게 했다.) 믿어져? 네가 죽었는데 사람들은 환호하고 있었어. (꼭 승전하기라도 한 것처럼. 희생을 당연시하고, 언제 닥쳐올지 모르는 우주적 재앙에 대비하느라 영웅 행세를 하는 살인자들과 합을 맞추기를 포기한 것뿐이야. 온몸을 헤집고 빨아들이는 와중에 토로하는 말은 제 귀에도 다소 변명처럼 들렸다. 꼭 병약하던 저를 간병하던 그를 두고 몰래 창문으로 도망치려다 들켰을 때처럼.) 방향을 바꿨다 뿐이지 나쁜 짓은 안 했어. (구심점이 있어야 하는 건 어느 쪽이든 마찬가지니까. 신뢰를 잃고 와해한 집단에서 명분을 가져오려면 대립이 최선이었고.) 내가 레드 스컬이나 피어스 같은 사람으로 보여?
steve
steve
그러니까 혼내지 마.
buck
buck
...... 네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어서 다행이네. (하이드라의 기술과 사상의 이면에는 대척점에 있는 이들을 제거하며 정보를 캐낸 윈터 솔져의 활약이 있었으니까. 이 두 손에 묻힌 피로 쌓아올린 역사를 이용해 그가 세상을 손에 쥐었다고.) ...... 글쎄, ...... (결국 제임스 뷰캐넌 반즈라는 인간이, 그의 몸뚱아리로 지어올린 무기가, 스티브 로저스의 삶에 어떤 역할을 하는지는 정확히 알 것 같았다. "그만해, 그러다 죽이겠어," 그렇게 시베리아에서 그를 말렸던가. 인간이 본래 가지고 있던 성질을 극대화시킨다 했던 혈청으로도 폭발하지 않았던 그의
buck
buck
분노에 불을 지피는 장치가 자신임을 깨닫고. 존재로도 부재로도 그에게 행복과 안식을 선물할 수 없다.) ...... 아파. (숨을 한 번 들이키고 꽉 잠긴 음성으로 속삭인다. 경련을 일으키며 접합부가 어긋나 덜그덕대는 팔이 머리에 심한 두통을 불러 일으켰고 온전히 인간의 것인 오른손은 뼈마디가 으스러져 부어올라 있었다.) ...... 나 아파, 스티브.
steve
steve
미안. 그러게 왜 고집부렸어. (통증 때문인지, 혹은 두려움 때문인지 그의 손등 위로 툭 불거진 힘줄이 떨리는 게 훤히 보였다. 조도 낮은 거실에서 허리를 팔로 감아 빈틈없이 끌어안은 채로, 목덜미에는 작은 치료용 주삿바늘을 위치시켰다. 조금 따끔할 거야. 괜찮아, 힘 빼고 나 봐봐.) 쉬이, 착하지.
steve
steve
(서두르지 않고 피스톤을 눌러 약물을 밀어 넣었다. 투명한 약액이 혈관을 타고 퍼져나가는 속도에 맞춰, 그의 귀가에 느릿하고 다정한 박자로 말을 건넸다.) 샘 윌슨이 그렇게 걱정돼? (그렇지만 그는 날 보면 제압하려 들 텐데. 누구 편을 들지는 정하고 연락을 해야지. 주삿바늘을 뽑고 뭉툭한 손끝으로 그 자리를 지그시 눌러주며, 남은 한 손으로는 그의 흐트러진 앞머리를 조심스레 쓸어 넘겼다. 어차피 널 찾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고, 너도 더는 혼자가 아닐 거야.) 버키.
steve
steve
날 사랑하지?

 


 

 

 

buck
buck
(예리한 주삿바늘이 목덜미에 닿는 섬짓한 감각을 끝으로 기절했던 것 같다. 아니 실은 그의 의도를 알고도 한점 반항 없이 몸을 축 늘어뜨렸고 그것이 제 선택이라 말한다면 변명할 여지도 없다. 그를 사랑하냐는 물음에 제가 답을 했던가 아니면 눈물만 떨구었던가. 눈을 뜨면 천장이 낯설어서.)
buck
buck
여긴 어디야?
steve
steve
(먼지 쌓인 공기가 폐부 깊숙이 축축한 곰팡내를 실어 날랐다. 젖은 목재 바닥을 밟으며 다가서선,) 고백만 세 번 했는데 세 번 다 차였잖아. 실연의 상처를 나한테 푸는 거야? (불공평하잖아. 분리되어 축 늘어진 의수를 가볍게 들어 보이곤,) 뉴저지 프랭클린 자연보호구역. 버려진 별장이 많거든.
steve
steve
뉴욕에서 한 시간도 안 되는 거리니까, 도망치면 살 수도 있겠네. (수족을 부러뜨리긴 했지만. 구속을 풀 위험이 있는 수갑이나 족쇄보다야 통증이 몇 배는 효율적이니까. 고통으로 길들이는 게 하이드라의 방식이기도 했고.) 아직도 아파?
buck
buck
...... (인상 찌푸려드는 건 온몸을 가시 세워 찌르는 듯한 고통 탓이 아닌 큼큼한 내음 때문이었고. 비브라늄 왼팔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살갗 벗겨지는 듯한 감각만 남아 환상통이 돌아온 모양이다 싶었고.) ...... '네 버키'를 다치게 한 적은 없나봐. (덜그럭대는 손목은 내버려두고 뼈가 끊긴 듯한 발목을 뻗어 가늠하고. 기어코 두 발로 땅바닥을 딛고 서선 그에게로 두어 발 쯤 디뎌 걸었다. 신체와 정신이 분리되면 의식이 그만두라며 고함을 질러대는 와중에 다리는 끊임없이 교차했고.) 하이드라의 이름을 걸었다더니 하는 짓이 비슷해졌네.
buck
buck
어, 아파. 아주.
steve
steve
나도 마음 아팠어, 벅. 너처럼 무고한 이를 고문하거나 죽인 적은 한 번도 없고. (완고하게 다물린 입술과 경계심 가득한 눈빛을 보건대, 딱히 믿을 것 같진 않지만. 당장에라도 무너질 것처럼 휘청이면 재빨리 두 팔을 붙잡았다. 실 끊어진 인형처럼 보이는 그를 제 품에 기대도록 받쳐안곤,) 그러면 큰일 나, 벅. 괜한 짓 하지 말고 얌전히 있어. 아니면 혹시 내가 잡아주길 바라고 움직인 건가? (폐가라고는 하지만 사용감 없는 가구들이 적나라하게 사생하는 광경은 실상 그의 집과 다를 바가 없었고. 천천히 바닥에 무릎을 대도록 만든 채 형형한 눈빛으로 멍한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기절한 내내 '스티브'라고 몇 번이고 부르는 목소리를 들었지만, 아마 그게 제 이름은 아니겠지.) 나 아직 대답 못 들었는데.
steve
steve
아직 날 사랑해?
buck
buck
그래, 날 보며 마음 아파했지만 멈추지 않았던 하이드라의 핸들러들처럼. (믿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다른 건 몰라도 스티브 로저스의 표정을 읽어내고 거짓의 여부를 가리는 것은 제 특기였으니까. 세상에 저만이 할 수 있는 일. 부러진 뼈끼리 딱딱대며 긁히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고 고장이 났음에도 배터리가 죽기 직전까지 입력된 일을 계속 해내는 로봇이라도 된 것 마냥 그의 앞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힘을 풀었다. 언제나처럼 저를 받아 안는 그의 품은 정말이지 너무나......) 알렉스도 처음엔 내게 잘해줬어. (처음 만났을 때엔 유행에 걸맞도록 가르마를 탄 금발을 왁스로 빗어넘긴 잘생긴 청년이었다. 웃을 때 눈가에 지는 주름이 제가 알던 것과 달라 기시감을 느꼈음에도 간만의 애정에 그의 바짓단 졸졸 쫓아다녔던 스스로를 떠올리며 헛구역질하다가.) ...... 그를 사랑하진 않았지.
buck
buck
응, 사랑해. 언제나.
steve
steve
(‘윈터솔저’를 다루던 핸들러의 용모가 하나같이 금발에 벽안인 것은, 시베리아에 남아 있던 하이드라의 자료를 본격적으로 탐독하기 전부터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같은 공장에서 찍어낸 인형마냥 표정부터 가르마의 방향마저 동일한 사진들을 보며 치밀어 오르는 토기를 억눌러야만 했고. ‘코드’가 적힌 노트에 새겨진 필체가 무척이나 익숙하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무기를 다루는 매뉴얼을 무기의 손으로 직접 작성하도록 명령했음을 알아차렸을 때 느꼈던 격렬한 증오는 말할 것도 없었고. 제가 가장 혐오하는 집단의 이름을 내걸고 캡틴 아메리카의 이름을 먹칠했을 때 실감한 자학적 쾌감을 굳이 부연할 필요는 없겠지.)
steve
steve
깜박했네. 넌 널 사랑해 주지 않는 사람만 골라서 사랑하는 특이한 습관이 있었지. (피어스의 이름을 들었을 땐 사정없이 미간을 구겼지만. 내가 죽여야 했는데.) 내가 널 버리면 네가 내 뒤를 졸졸 따라올 가능성이 조금쯤은 생길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런 걸 보려고 멀리서 온 건 아니거든. 난 네가 살아 숨 쉬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눈물 나게 기쁘니까. (고개를 천천히 숙였다. 머리칼에 가려지지 않아 훤히 드러난 귓가를 서늘한 호흡으로 간지럽히곤,) 코드도 와칸다에서 해제해 준 거야? 대가로 널 달라고 하진 않았고?
buck
buck
(자신은 저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만을 사랑한다는 말엔 이제껏 구겨지지 않으려 애를 썼던 얼굴이 일순 무너졌다. '스티브 로저스'와 그를 사랑하는 일이 남긴 폐허를 온전히 내보이던 것도 잠시.) да. (하이드라의 이름을 걸고, 그들의 표식을 짊어지며 저를 그들과 다를 것 없이 무릎 꿇려 두었으니. 그렇다면 응당 그들의 언어로 말해야 하지 않겠는가. 녹슬은 발음의 끝이 삐걱대는 것은 오래도록 사용하지 않은 탓인지 혹은 목께로 올라오는 울음 탓인지.) Нет, не сделали. (부러진 손발목의 뼈가 어긋난 채로 아물어가는 것을 생생하게 느끼면서. "넌 더럽지 않아," 그렇게 속삭이던 음성으로 또다시 몸을 더럽혔냐는 물음을 건네 오면 다시금 제 살결 위로 벌레가 기어다니는 듯한 감각이 돌아오고. 습관처럼 손톱을 세워 피부에 피를 내려다 손가락 구부리면 전해져 오는 통증에 숨 크게 들이키고.) ...... 같이 가지 않을 거야.
buck
buck
...... 하지만, 네가 여기 남겠다면.
steve
steve
Бесплатный сыр бывает только в мышеловке, Солдат. Ты же знаешь. (처음 러시아어를 가르쳐 달라고 부탁했을 때 나타샤는 당연하다는 듯 덧붙였다. '이것도 사람이 쓰는 언어야. 스티브. 잊지 마.' 지금으로선, 글쎄. 언제부터 거리낌이 없어졌더라. 언어 대신 죄책감에 세뇌당한 듯한 그를, 안타까운 눈빛으로 응시하다가 하나 남은 오른손을 쥐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건 좀 더 얘기해 보고 나서. (회복할 만큼 시간을 오래 지체하고 싶진 않은데. 그러나 자의로 투항하지 않는 한 저항은 이어질 테니까. 손가락 사이사이에 깍지를 끼운 채 무너져가는 바닥에 앉아 시선을 맞췄다.)
steve
steve
토니도, 나타샤도, 완다나 바튼, 토르의 흔적도 없어. 피터의 존재감은 희한하리만치 희미해져서 마치 처음부터 없었던 사람 같고. (다들 죽었겠지. 아마도. 한숨을 내쉬며 눈앞의 붉게 부어오른 눈가를 엄지로 짚었다.) 네가 왜 이런 세상에서 살고 싶어 하는지 궁금해. 스티브의 명령 때문이야?
buck
buck
...... 말했어, 나는. (나는 다시는 하이드라의 세상에서 살지 않아. 그가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도 모르겠으며 역사가 어디까지 맞닿아 있는지도 알 수 없지만 단 하나 희망에 거는 것은 그가 이것 만큼은 이해하리란 믿음이었다.) ...... 피터가 누군데. (모를 소리를 지껄이는 걸 보니 다른 점이 없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스티브는 내게 명령 같은 것 하지 않아. ("아니, 않았어," 라고 정정하며 혀 끝을 지근지근 씹어대고. 부어오른 손 마디 사이로 두툼한 손가락 밀려들어오면 저도 모르게 뱉어낸 앓아대는 음성에 스스로 놀랐는지 눈이 큼직하게 뜨인다.) ...... 나를 망가뜨려서라도 곁에 두고 싶어?
buck
buck
(어릴적 스티브가 찬사를 아끼지 않던 반 고흐를 떠올린다. 스스로 귀를 잘랐다던. 손깍지 풀리면 그가 앉아있던 의자에 아슬하게 박힌 못을 뽑아들어 망설임 없이 제 귓바퀴에 박아넣었다. 아무래도 효율을 중요시하는 듯해 도주로를 차단하기 위해 손발목 부러뜨리는 데에야 거리낌이 없는 모양이었으나 귀를 잘라내는 건 아무런 효과 없이 고통만 가져다 주는 일이었으니까.) 데려가. 하나하나 잘라서. 도와줄게.
steve
steve
명령하지 않았지. 책임지지 않았고. (아직도 모르겠어? 그는 널 버렸어. 잘난 듯 이상을 논하며 널 구했지만 네가 범하지도 않은 살인을 청산하기 위해 현실적으로 어떤 재판을 겪어야 하는지, 그 과정에서 낱낱이 공개될 네 치부와 그에 따른 수치심도 고려하지 않았다고. 분노에 끓던 사고는 녹이 들러붙은 나사가 귓가를 향해 꺾여 내려가자, 곧장 끊겼다. 그의 손등에 힘줄이 돋는 순간, 망설임 없이 오금을 걷어차며 중심을 무너뜨리는 것과 동시에 멱살을 잡아 그대로 바닥에 처박았다. 제발. 정신 좀 차리라고.) 널 걱정하고 있잖아, 버키. 이 멍청아!
steve
steve
(급소인 관자놀이는 다행히 피한 것 같았지만. 암살자답지 않게 비효율적인 부위에 내리꽂힌 흉기는 곧장 뜯어냈고. 곧바로 몸 위로 올라타 두 손으로 목을 짓누르고 체중을 실어 압박했다.) ……하이드라의 방식이 싫으면서 내가 여기 남는 건 괜찮다고. (제가 무슨 짓을 벌일 줄 알고. 그럼에도 그의 자포자기한 눈동자에 서린 절망이 자신을 난도질하는 것 같아서.) 모르겠어, 벅? (너한텐 선택권이 없어. 난 네가 아니라, 날 망가뜨려서라도 네 곁에 있길 원한다고. 바닥을 긁는 옷감 소리와 거친 호흡이 뒤엉키는 가운데,) 네 새 핸들러를 네 손으로 죽이겠다고 약속해.
ste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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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여기 남을게.
buck
buck
(숨통 반쯤 틀어막히면 가슴팍 가쁘게 오르내리다 이내 웃음이 새었다. 언뜻 기괴하기까지 한 소리로 키들대다가.) 너는 하이드라의 이름만 이용한 거라며, 스티브. 내가 없는 세상이 싫어서 그랬다며. (나는 여기에 있는데, 또다시 이 곳에서 네 마음에 내키지 않는 것을 찾아 제거할 생각부터 하고 있어. 어느새 말갛게 갠 회색 눈동자가 무구한 빛을 띠고 쉬어 갈라지지 않은 낭랑한 음성으로 묻는다.) 나 아직 핸들러가 있는 삶을 살고 있어? 그럼 나, 왜 살아?
buck
buck
(이 몸뚱이에다 쓰임을 입력해 두고 저를 사람 아닌 것으로 만든 자들의 세상에서 여직 벗어나지 못했다면. 버키 반즈의 의식이고 영혼이고 복잡한 것들은 치워버린 채 인형 속을 채워넣듯 임무와 만트라를 주입한 껍데기로 존재를 이어가고 있는 것이라면. 연한 혈관을 건드렸는지 귀의 찢어진 상처에서 흐르는 피가 쉽사리 멎지 않아 의식이 흐리멍덩해질 수록 오히려 가벼워졌다.) ...... 핸들러를 죽이라고. 좋아. (그 순간 내릴 수 있는 선택은 단 하나였고 비로소 자유가 된 것만 같은 해방감에 입꼬리 끌려 올라간다. 잇새에 혀뿌리를 두고 콰득 씹어버리면, ......)
buck
buck
내 핸들러는 나인 걸로 해. 나 사람이잖아.
steve
steve
……. (고통스럽게 일그러진 낯이 수면 너머처럼 흐릿하게만 보이는 그의 낯을 응시했다. 당연히 그의 연락처에 저장된 이들을 가리키는 말이었는데. 무른 살덩이가 잇새로 세게 잘려 나가는 소리, 그와 엇비슷하게 실핏줄이 터진 눈동자가 떨리는가 싶더니 이내 깊게 감겼다가 뜨였다. 왜 살아야 하냐고, 그 문장이 다시 뇌리를 뒤흔들었다. 결국 그를 사람인 채로 죽이고, 자신은 그를 영원히 구할 수 없음을 곱씹으면 되는 것인가. 그게 내 자신의 벌이고? 힘이 들어가지 않은 채 그저 누르고만 있던 손을 떼었다. 코드가 지워졌다고 했지. 하지만.) Спутник.
steve
steve
사람은 단어 하나에 자유의지를 박탈당하지 않아. 버키.
steve
steve
(입안으로 울컥울컥 쏟아져 들어오는 것을 받아 삼키며 비릿한 향취가 밴 혀를 부드럽게 얽었다가 떼어내곤,) 그런 의미에서 나도 사람이 아닐지도 모르고. ('버키'라는 단어 하나면 시공간을 막론하고 열여섯 먹은 꼬맹이가 되고 마니까. 머리 위로 축 늘어진 손등을 옮겨 대못을 치켜올렸다. 한 치의 어긋남 없이 손바닥 가죽을 짓이기며 파고들었다. 의식의 심해 속으로 가라앉는 것조차 허가하지 않겠다는 듯. 뼈와 뼈 사이를 가르고 들어온 금속의 이물감이 신경을 긁어냈고,) 아직 죽어도 된다고 허락 안 했어.
buck
buck
...... (단 하나 해제하지 못한 코드 방 안에 울렸다. 기록 그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은 그 단어를 오직 그에게만 아주 비밀스럽게 일러주었던 것을 떠올리면 배신감보다는 절망감이 커졌고. 온몸이 추욱 늘어져 신체에 대한 통제를 잃어버린 의식이 비명을 질렀다. 유일하게 제 마음대로 굴러가는 눈동자에 공포가 서렸다가 이내 체념으로 일럳인다.) ...... 으, 으으. (힘이 들어가지 않아 사람이 아닌 짐승의 것인 듯한 소리를 흘려보낸다. 뼈대가 부서진 채 근육이 아물어 이상한 각도로 비틀린 손바닥에 귀를 꿰뚫었던 못이 다시금 박힌다. 신경이 몰려 가장 감각이 예민한 곳을 날붙이로 파고드는 섬찟한 감각에 비명조차 내지르지 못하고. 살아 날뛰는 의식이 몸 속에 갇혀 머리가 터질 것만 같았다.) ...... 스, 티브. (마취가 풀린 듯 굳어버린 혀가 입 안에서 제멋대로 돌아다닌다. 왜 날 아프게 해, 왜.
buck
buck
너는, 너는 나한테 그러면 안 되는 거잖아. 평생 단 하나의 태양만을 알던 회색 시선이 잔뜩 흐려진 시야에 거짓말처럼 선명한 파랑에 멎고. 흰자위 혈관이 터져 불그죽죽하게 물든 눈이 꼭 바닷가의 일몰 같아서. 원망이 사그라들고 '아프겠다,' 떠오른 생각을 밖으로 내뱉었던가 싶었고.) 멍청이. (결국 그의 지독한 질투며 소유욕은 제 사랑을 믿지 못해서 생겨난 것일까. 그와 닮은 이들에게 쉽사리 굴복해버린 탓에 그의 신뢰를 영영 잃었나 싶고. 출혈이 심했는지 느릿하게 잦아든 심장박동도 귀에 울렸다. 그래도 눈 감기 전에 마지막으로 보인 게.)
buck
buck
너라서 좋아.
steve
steve
……왜? (완전히 멀어져 육신과 분리되어 버린 듯한 의식이 텅 빈 공간을 맴돌았다. 분명히 그를 찌르고 있는 건 자신이었지만 갈비뼈 부근이 욱신거리는 것 또한 저였고.) 차라리, 비난이라도 하지. (그가 두 번째로 눈앞에서 죽었을 때 동료들은 뭐라고 했던가. '그만하면 의미 있는 희생이었잖아.' 애초에 버키는, 너는 끝없이 희생만 했는데. 처음부터 그에게 과오나 죄는 존재하지 않았는데. 세상은 마치 네가 죽어 마땅하다는 것처럼. 이 와중에도 약간 두려워하거나 걱정하는 듯했던 얼굴이나. 제가 억지로 입을 맞춰도 밀어내지 않고 오히려 붙잡으려 했던 그 순간들이.) 안 돼.
steve
steve
(마치 모든 빛이 꺼지고 수몰되거나 무너지는 곳에서 그를 꺼내는 듯이 손목을 낚아채 잡아끌었다. 그리고 품에 넣었다. 싫어. 벅. 두고 가지 마. 혼자 떠나지 마. 쥐어짜듯이 중얼대며 도통 그를 놔주려 하지 않았다. 무엇이 안 되는지는 설명하지도 못한 채로. 정의를 배신했고, 신념도 등진 채 몇 명이나 죽였는지 기억도 안 난다. 부서져라 움켜 안고 있던 그를 내려다보았다. 아직 살아 있으니까. 지금이라도 병원이든 어디든 데려가면, 아니. 차라리 이곳에서 같이 끝내기라도 한다면…….) 내가.
steve
steve
……네 곁에 있어도 괜찮아?
buck
buck
(눈이 감기는 순간 그의 안색이 시퍼렇게 뜨는 것이 보였다. 안 되는데. 저 애를 달래줘야 하는데. 우는 법조차 몰라 꿋꿋하게 모든 절망을 분노로 치환하는 그 습관을 바로잡아 줄 사람이 저 말고 또 있을까.) ...... 바보. (구멍이 뚫려 피가 철철 흐르는 손을 힘겹게 들어올려 그의 뺨을 짚는다. 울고 있네.) 꼬맹아. 내가 먼저야. (널 쫓아다닌 것도, 사랑한 것도. 너덜너덜해진 혀를 움직일 때마다 왈칵 배어나오는 피가 목구멍을 타고 비릿한 향을 전한다. ...... 맛 없네. 축 늘어져 제 말을 듣지 않는 몸을 어떻게든 일으키려다 고개만 겨우 들어올려 입술끼리 맞물린다.) 인정해.
buck
buck
네가 내게 잡힌 거야. 네가 날 잡은 게 아니야.
steve
steve
(우느냐고? 눈물이 두려움과 공포가 처음으로 몰려온 '사람'이 할 수 있는 첫 번째 반응이라면 아마도. 그렇게 대답하는 대신 창백한 낯을 떨구고 아프도록 움켜쥐었던 그를 붙잡은 두 손에 힘을 들여 가로로 안다시피 들어 올렸다. 처음 그를 데려올 때와 거의 비슷한 자세로. 불붙듯 순식간에 달아올랐던 눈가는 가라앉았으나 여전한 비분함으로 가슴 한구석이 꽉 막힌 채. 결국 난 이 얼굴 앞에선 질 수밖에 없는 거지.) 사람들한테는 뭐라고 설명할 건데. (바깥에 정차해 둔, 훔친 것이 명백한 오토바이에 올라타 그를 먼저 앉혔다. 다친 발목이 스텝에 닿았는지 억눌린 신음을 내뱉자, 달래듯 등을 쓸어만지며 시동을 걸었다.) 누가 봐도 정상적인 상황은 아니잖아. (불만스레 눈을 내리깔다가,) 네가 다른 사람이랑 친하게 지내는 건 싫어. 하다못해 상담사라는 인간만이라도 죽일래.

 

 


 

 

 

 

steve
steve
나이가 무슨 상관인데, 군대에선 먼저 입대한 쪽이 연상이고, 계급이 2순위야.
buck
buck
내가 먼저 입대했는데?
steve
steve
나보다 먼저. 그래서 네가 형이잖아.
buck
buck
입대 안 했어도 내가 형이야. 넌 꼬마잖아.
steve
steve
맞춰줄 때 즐겨야지, 형. 계급으로 넘어가면 할 말이 없어질 텐데.
buck
buck
계급으로 넘어가면 얼마든지 대위님이라고 불러드릴 수 있습니다만.
steve
steve
넌 복종하는 건 안 어울려. 버키. 차라리 책임지는 가장 노릇이 낫지.
buck
buck
하지만 상급자에게 복종하지 않을 수는 없잖습니까.
buck
buck
대위님, 대위님. 싫으세요, 이렇게 부르면?
steve
steve
딱딱하지, 거리 두는 것 같고. 무엇보다 존중이나 경외가 전혀 안 담겨 있잖아. 그런 건 필요 없지만.
steve
steve
언제는 핸들러는 싫다더니. 복종하고 싶다면 눈을 똑바로 뜨고 있으면 안 되지, 병장.
buck
buck
핸들러와 상급자가 같습니까? 존중이나 경외는 이름에도 한껏 담았는데 안 들리셨나 봅니다.
buck
buck
...... 얼굴 똑바로 보지 않으면 더 성이 나실 것 같아서.
steve
steve
다음부턴 애정만 담아. 그거면 충분하니까.
steve
steve
(목에 걸린 인식표를 손가락에 걸고 홱 잡아당겼다. 가까이에서 눈을 들여다보곤,) 뭐가 다른지 난 잘 모르겠는데. 설명해 봐.
buck
buck
(체인이 목덜미 연한 살 사정없이 긁으며 딸려가 불그죽죽한 생채기가 남고. 새파란 눈 들여다보면 순간 홀린 듯 답이 없다가.) 존중과 경외가 다르죠.
steve
steve
둘 다 받기 싫은데, 큰일 났네. 그럼 난 상급자가 아니라 핸들러여야 돼. 둘 다 포기하고 풋내기로 남는 방법도 있겠고.
buck
buck
핸들러를 사랑할 순 없으니 풋내기여야겠네.
steve
steve
사랑하기까지 하게? 그러기엔 난 너한테 뻔뻔한 짓을 너무 많이 저질렀는데. 수틀리면 또 그럴지도 모르고.
buck
buck
원래 사랑했어, 바보야. 게다가 넌 원래 뻔뻔했고. "버키, 어쩔 수 없었어." "버키, 어떻게 가만히 있어?"
steve
steve
"입대했어." 도 빼면 안 돼. 팔다리를 다 부러뜨리고 납치한 건 처음이었을걸. 이미 절취선이 그어진 왼팔이 눈앞에서 갈려나갔던 사람을 상대로. ……미안. 네가 자꾸 말 안 듣길래 화가 나서.
buck
buck
안 아팠어, 괜찮아. 별로 미안하지도 않으면서. "입대했어," 그 말을 그 뒤로 사나흘을 곱씹어도 화가 났지.
steve
steve
아무튼 영구적이었잖아. 널 구하고 수많은 사람들을 구했는데 그게 뭐가 중요해.
steve
steve
또 그러면 똑같이 굴 거라서. 잘 생각해 봐, 벅. 네가 좋아하던 꼬맹이는 분명 이런 거 못 하던 녀석 아니었어? 어쩌면 가짜일지도 모르지.
buck
buck
스티브. 내가 좋아하던 꼬맹이는 옛날에도 "네가 발목을 접질려서 좋아, 일하러 나가지 않아도 되잖아," 라고 말하던 놈이었어. 어쩌면 네가 입 안의 사탕처럼 굴며 내 환심만 사려 들고 눈웃음만 실실 비쳤다면 의심했을지도 모르겠네.
buck
buck
어쨌든 영구적이었다고 한 번만 더 말하면 정말 화를 낼 거야. 또 혀 씹는 걸 보고 싶어?
steve
steve
……대놓고 말하진 않았거든? '그럼 오늘은 일하러 나가지 않고 나랑 하루 종일 있어?'라고 했지. 게다가 네가 선술집에 다녀오면 항상 술 냄새가 진동했다고. 금주법이 뭔지도 모르나.
steve
steve
너도 약속해, 그럼. 상담사고 나발이고 간섭에 응하지 마. 당분간은 연락도 받지 말고.
steve
steve
알몸으로 나갈 건 아니잖아, 그치?
buck
buck
내가 널 알게 된 이래로 가장 만족스러운 얼굴을 해놓고선. ...... 술 냄새가 그렇게 싫었어? (술을 한바탕 들이키고 나면 집으로 기어들어가 스티브의 좁은 품에 얼굴을 들이밀고 마음의 반의 반이라도 애정 표현을 할 용기가 생겨서. 그 기분이 좋아서 몇 번이고 잔을 들이켰던 것 같은데.)
buck
buck
상담은 받고 싶어서 받는 게 아니라, ...... 아니야.
buck
buck
벗기지 마. ...... 알았으니까.
steve
steve
(마음에 드는 거라곤 하나도 없었지. 선착장에서 일하는 사내 중 가장 어린 게 그라는 것도. 시커멓고 우락부락한 사내들이 잘했다며 쓰다듬으면 헤실거리며 웃는 것도. 스피크이지 바에서 파는 술이라 해봤자 럼에 공업용 알코올을 섞은 싸구려일 텐데. 좋지도 않은 걸 마시다가 탈이라도 나면…….)
steve
steve
널 찾아오거나 통제하려 들면 내가 알아서 처리할게. 여차하면 한동안 미국을 떠나는 것도 방법이겠네. 죽은 줄 알았던 캡틴 아메리카가 뉴욕 한복판에서 걸어 다니면 동상이 살아 움직이는 걸로 보일 테니까.
steve
steve
……불만 갖지 마. 그냥 네가 따라오면 되는 걸 굳이 일일이 맞춰주는 중이니까.
buck
buck
...... (부둣가의 사내들끼리야 손도 입도 거칠어지는 법이라. '예쁜이'나 '막내' 따위의 호칭을 혹여 길 가다가도 들으면 그의 얼굴 사정없이 구겨지기야 했었지만.) ......굳이? 말 참 예쁘게도 한다.
buck
buck
캡틴 아메리카는 사망 처리되지 않았으니 존재 자체는 문제가 안 될 거야. 오히려 사람들은 나보다 널 더 반기겠지. 너보다 좀 모자란 녀석에게 방패가 넘어갔다던데 도로 뺏어 오든가.
steve
steve
어떤 자식이 네 걸 가져가? (당연히 자신이라면 버키에게 건넸을 거란 예상에서 나온 대답이었다. 그가 의존할 모든 것을 뺏어갈 참이라면 적어도 정신적으로 의지할 상징이라도 남겨 놨겠지. 단말키를 켜 '2대 캡틴 아메리카'를 검색해 보곤,) 얼굴이 비대칭이네. (반항 잘하게 생기진 않았는데. 후임까지 있으면 죽은 게 맞지. 한 걸음 물러서서 소파에 주저앉았다. 그대로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네가 죽은 지 너무 오래됐어, 버키. 이거 꿈인가?
steve
steve
머리 짧은 너까진 상상 못 할 것 같은데.
buck
buck
나한테 안 줬어. (샘의 이름만 나오면 사납게 굴었기에. "얼굴이 비대칭" 이란 말엔 그를 만난 이래 처음으로 웃음을 터뜨린다. 그래 보았자 몸이 뒤흔들리며 찾아오는 고통에 힉 숨 들이키며 멎었지만.) 훈장 받은 녀석이래.
buck
buck
(쿠션에 반쯤 몸 기대어 눕다시피 앉아있던 소파가 흔들리면 또 낮게 앓는 소리를 내다가. 순간의 아드레날린 러쉬가 지나가니 손발목 부러진 자리도 관자놀이 겨우 비껴간 귀의 상처도 모두 아파서. 절로 일그러지는 표정을 풀어낸다.) ...... 머리 짧아서 싫어?
steve
steve
(쉽게 낫는 몸이라 해도 한동안은 쉬는 편이 좋겠지. 거의 잘려 나갈 뻔한 귓가와 관자놀이 부근의 희미한 흉터를 훑다가 신경질을 내듯 손톱을 세워 긁었다. 반 고흐도 테오 앞에서 자살하진 않았어, 멍청아.) 실연 당한 사람 같아. (뻣뻣한 머리칼은 손끝에서는 한없이 순해져 꽤 중독적인 촉감을 자아냈고. 한숨을 내쉬며,) 네가 손수 자른 건 아니길 바라. (결을 반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느껴지는 반항심에 비스듬히 입꼬리를 올렸다.) 내가 너라면 날 단호하게 밀어냈어. 넌 캡틴 아메리카가 아니라고. 정신 차리라고.
steve
steve
널 인질 삼아 날 붙잡아 두는 거야?
buck
buck
(손발목의 근육이 어긋나 맞물린 뼈대에 맞추어 아물어 내려다 보면 죄 부어터져 있었다. 어쩌면 그것을 의도한 것일지도 모르겠고, 이걸 고치려거든 모두 새로 부러뜨려야 할 테니.) ...... 실연 당한 사람이 맞긴 하지.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은 영영 갈 수 없는 곳으로 떠났으니 그걸 달리 뭐라 부르겠는가. 머리는 스스로 잘랐다. 하이드라가 제게 남겨 둔 상징이나 다름없는 기다란 머리칼을 자르는 와중에 제 시야 한 구석에 늘 웅크려 앉아 있던 그의 환영은 그러지 말라며 입을 바끔댔다. '네 말이 안 통하는 기분이 어떠냐, 이 자식아,' 그렇게 생각하며 기어코 머리를 다 잘랐고. 예전 스티브를 말릴 적에 자신도 벽을 보고 말하는 것마냥 제 의견은 하나도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니까 꽤 고소하다 생각하며.)
buck
buck
...... 그게 너와 나의 차이 아닐까. 나는 널 밀어낼 수 있었던 적이 단 한 번도 없으니까.
buck
buck
글쎄. 죽겠다는데 기어코 살려낸 게 누군데.
steve
steve
(하이드라가 남긴 기록에 따르면 그의 머리를 길도록 내버려둔 목적은 두 가지였다. 미용 따위를 의도한 건 당연히 아니었고. 하나는 유사시에 머리채를 쥐고 통제를 용이하게 하고자. 둘은, 고문당할 당시 그는 종종 '앞이 안 보이니 머리나 잘라 달라'고 도발하곤 했고. 그 미약한 저항이 완전히 짓밟힐 때까지 ECT로 뇌를 지져댔다고 했으니까.) ……아직 죽어도 된다고 허락 안 했어. (손수 자른 탓인지 결이 고르지 않은 머리칼을 매만지다가 뾰족한 정수리에 입술을 묻었다. 그대로 타고 내려가 수염이 까칠하게 돋아난 볼을 구문으로 누르다가,) ……널 버린 스티브가 돌아오면 가관이겠네. 그렇게 되면 누구 편을 들지도 궁금하고. (기이한 각도로 휘어진 손을 들어 올려 하나하나 입을 맞췄다. 보랏빛으로 물든 검지와 중지 틈에 혀를 밀어 넣어 척척히 적시곤,) 둘 다 네가 사랑하는 스티브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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