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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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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저나 넌 왜 이렇게 잘 아는 거야, 유튜브랑 스포티파이도 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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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자는 새에 휴대폰 좀 만져 보니까 얼추 알겠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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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따로 교육 같은 것도 받지 않았을까 싶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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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요한 정보는 전부 주입했겠지. 일단은 유능한 무기 취급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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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알려줬어야 했는데, 개자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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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치만 내가 너에게 알려줄 수 있는 것도 좋은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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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려주긴 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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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모르면서. (이마 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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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야. 뺨 덥석 붙든 채 마구 입술 붙이곤,) 잘 알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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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텍스트 메세지와 아이메세지가 뭔지 알아, 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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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로 듣는 것보다 축음기가 더 매력적이라고 생각할 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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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술 쪽쪽 붙여오면 웃음 터뜨리고. 근래 들어 많이 웃는 것 같았고 때문에 뺨이 아프기도 했다.) 알았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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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시지보다는 손으로 쓴 편지가 더 와닿고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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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야 그렇지. 타자는 낭만이 없단 말이야. 디지털로 그린 그림보단 손그림이 더 익숙하다고. (요즘 들어 웃음기가 많아진 것 같아 저조차 마음이 풀리는 듯 했다. 처음 만났을 때 기계처럼 딱딱하게 대응하던 그를 생각하면, 정말. 많이 변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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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도 흑백 필름이 더 낫더라. 아, 반지의 제왕 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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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멋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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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이 되어 날의 한기가 가시고 나니 따뜻함에 물렁물렁 풀려서는 음성도 높아진 데다 자주 웃게 되어서. 대신 두통을 자주 호소하긴 했지만 몸의 통증 정도야 사소한 불편함일 뿐이라.) 디지털로 그리는 그림은 손그림이랑 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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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그건 재미있고 멋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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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들 얼굴도 잘 보여서 좋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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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다르냐면……. (오른손을 끌어다 검지를 세워 제 어깨에 대어주며 작게 속삭였다. 부드럽게 손등을 감싸 아래로 선을 긋도록 이끌곤,) 아사천은 붓을 기울이고, 얼마나 페인트를 덧바르는지에 따라 색의 농도까지 조절할 수 있어. 일부러 묽게 만들어 퍼지게 할 수도 있고, 점점이 두껍게 발라 양감을 드러낼 수도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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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면에 대고 그리는 거와는 느낌이 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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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로 성공한 사람은 아니니까, 아마추어의 한탄이긴 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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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내 치고 그리 엷지도 않은 손끝은 그의 두툼한 손바닥에 감싸여선 꽤 가녀린 듯 보였고. 살이 내려 그런가. 각진 어깨선을 따라 훑어내리면 지문 아래 단단하고 부드러운 살결이 느껴져 눈 둥글게 뜨고 그 모양을 따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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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공하면 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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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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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따금 잊고 있던 위협성을 상기시키곤 하는 왼손 또한 적잖은 쾌감을 안겨주곤 했지만. 뼈마디가 드러나도록 메마른 오른손이 제 살갗을 문지르고, 부드럽게 찌르면 그림처럼 빙그레 웃었다.) 은퇴하면 다시 그려볼까? (그가 훑고 지나간 팔을 뻗어 목덜미에 휘감곤 쪽, 입술을 붙인 채.) 익명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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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황 같은 건 알리기 싫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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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이 볼품없이 내리고 있다는 자각은 있었지만 한 번 짧아진 입이라 식욕이 돌아올 낌새가 보이지 않았고. 그가 간혹 속상해하는 기색을 비치면 가슴이 아렸다. 그 품 속에 익숙하게 엉겨붙어 입술 쪽, 쪽.) 나만의 예술가인 것으로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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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모델은 새로 구해야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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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는 게 죄다 나면 금세 들킬 것 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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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말고 다른 사람 안 그려. (애초에 널 오래 기억하고 싶어서 시작한 건데, 새삼. 턱을 한 손으로 감싸 쥔 채 돌려가며 입술을 뺨에 문지르다가 목덜미에 고개를 묻었다. 아프지 않을 정도로만. 가볍게 이를 목께에 박아 넣곤,) 얼굴 말고……. (켈로이드 흉터가 뭉그러진 어깻죽지를 엄지로 보드랍게 누르다가,) 몸만 그리면 되는 거 아니야? 너무 변태 같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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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슷한 시도는 했는데. 너 쫓아다닐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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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어쩌면 그 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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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변태 맞는 것 같아. (제 어깻죽지에 수그린 그의 고개 들어올리도록 해서는 아랫입술 잇새로 앙앙 물어당기고. 예나 지금이나 벗겨 두면 별 볼품 없는 몸뚱이였지만.) ...... 그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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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여 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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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대 위에 폴싹 누우면 사슬 소리가 찰랑댔고. 소리와 불빛에 민감한 탓에 어두운 간접등 하나만 밝혀 둔 방 안의 고요함에 가끔 큰 소리가 울리면 어깨가 툭툭 튀어올랐다. 강아지 인형을 품 안에 욱여넣어 숨 고르고.) 너 뭐라도 먹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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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네가 앞에 있다 상상하면서 춤도 췄는데, 새삼. (당시엔 자연스럽고도 당연하게 느껴졌지만, 혹여 감시 카메라를 통해 본 사람이 있다면 꽤 당혹스러운 광경이었겠지. 노트북으로 인터뷰를 찾다가 뚜껑을 닫고 소리 없이 흐느끼거나, 뭔가에 홀린 것처럼 버키 반즈에 대한 자료를 찾아보며 그의 모습을 기록에 남기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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널 쫓아다닐 땐. (가장 최근에 본 모습부터 그려보았고. 직접 입기보단 남이 입혀주도록 설계된 전술복과 잘록한 허리 윤곽. 그것들을 스케치하던 시절을 떠올리며 그의 가느다란 허리선을 검지로 덧그리곤,) 다른 인파 틈에 뒤섞여도 널 찾아낼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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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릭 요거트로 대강 때우긴 했는데. (때마침 침대 아래에서 야옹, 우는 알파인을 안아다 그의 가슴팍에 올려주곤,) 네가 같이 먹는다고 약속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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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대편 건물의 창 밖으로 눈 빼꼼히 내밀어 그가 밤중에 서성이는 모습이나 뭔지 모를 움직임에 취해 있는 것을 꽤 자주 보았는데. 그게 춤이었나.) ......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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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아지 인형의 귀를 잘근대다 그 위로 꾸욱꾹 발을 눌러대는 고양이를 보며 푸슬푸슬 웃었고.) ...... 그러면 조금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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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리 해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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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물린 얼굴과 입술에 적힌 답안지를 읽듯 오르내리던 새파란 눈동자가 이내 빠르게 결론을 도출했다. 다 아는 얼굴인데, 저건.) 봤으면서도 같이 안 춰 줬어? (나빠, 벅. 말랑한 볼을 가볍게 꼬집어 당기곤 침대 밑에 둔 열쇠를 발로 차 꺼냈다. 익숙하게 붙잡아 발목께에 단단히 묶인 쇠사슬을 풀어내곤,) 나도 도울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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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이어 비척거리며 내려오는 그가 바닥에 발을 디디도록 부축해 주곤,) 오늘 메뉴는 뭔가요, 쉐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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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들켰다. 발목 어귀에 자주 생채기가 나 잘 아무는 살결에도 흉이 남은 것이 보여 그는 속상해할 테지만 저는 마음에 들었다. 그가 제게 낸 흔적이 오래, 영구히 남는 것이.) 그럼 재료 손질은 네가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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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에 손 대는 것 허락할 리가 없으니까. 메뉴를 묻는 것에 잠깐 생각에 잠겼다가 스스로 냉장고 문을 열었다. 얼굴에 훅 끼치는 냉기에 콧잔등 찡그렸다가 재료를 살피곤 도로 그에게 안겨들었고.) 필라프 해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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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만 먹는다면 그의 손에 잡히는 것은 모조리 무기가 되고야 말겠지만. 날붙이가 달린 건 그의 자해 충동을 부추기는 것처럼 보였으니까. 차라리 자신을 임무로 간주하며 덤비는 건 나았다. 가끔은 그 와중에도 자신의 의지로 모든 난장판을 정리하곤 침대 위로 쓰러져 죽은 듯이 잠들곤 했으니까. 냉장고를 여는 걸 발견하면 화들짝 놀라 안겨 오는 그를 온몸으로 보호하듯 감싸곤,) 벅. 괜찮아? ……. (이내 민망하게 웃으며 당근과 베이컨, 양파 따위의 재료를 꺼내곤 어깨로 밀어 문을 닫았다.) 미안, 조금 놀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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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주도 한 잔 하자, 어때? 취하진 않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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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스한 품에 안겨들어 숨을 색색 고르고 그의 온기를 빌려오고자 살결을 마구 부볐다. 언젠가 배달되어 온 식재료를 살펴 보고는 라이스와 스테이크 소스를 발견해 안색이 밝아졌다. 라이스 봉지는 뜯어 사용할 만큼만 덜어 물에 불려 두고 나머지는 따로 용기에 담아 두는 것은 모두 어릴적 살림하던 버릇이었고. 마늘과 베이컨, 각종 채소를 그에게 밀어 두고선 그의 어깨에 턱을 올렸다.) 이거 썰어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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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맥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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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리도 괜찮은 취미이자 하나의 치료법이 될 수 있다는 페퍼의 충고를 새삼 되새기며 잘 씻어낸 재료들을 도마 위에 올려두었다. 본래부터 집안일에 능숙했던 데다 손재주도 상당한 그에게 꽤나 어울리는 일인 것 같고. 두 갈래로 보조개처럼 갈라진 턱을 가볍게 조물거리다가,) 막 부려먹네, 이제. 소스는 언제 주문했어? (뒤이어 그의 눈가를 손으로 가리곤, '불 올리고 있어 봐.' 재빠르게 식도를 꺼내 칼등을 눌러 잘게 다지기 시작했다.) 난 코스트코에서 배달만 시켜 봤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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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군 팬에 대강 손을 올려 온도를 가늠하려다 눈치를 보고는 버터를 조금 떠 녹는 것을 확인하고 오일과 버터를 적당히 둘렀다. 버터가 녹으면 페페론치노와 마늘을 쏟아넣고는 그의 팔을 잡아끌었다. "마늘 향 나?" 둔하기 짝이 없는 감각을 믿지 못해 확인을 받고서야 베이컨을 넣었고. 무언가 부족하다 싶어 계란을 하나 깨 넣고는 버터와 크림을 조금 섞어 스크램블 에그를 만들고선 적당히 덜 익은 감을 보고는 불려 두었던 라이스를 부어 넣고. 들들 볶다가 시판용 소스를 집어들어 '원래 소스도 만들어야 하는데,' 하고 중얼거리다 밥알이 끓게끔 둘렀다.) ...... 냄새 어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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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뚜껑을 덮어 조금 끓게 두고는 다시 그에게 안겨들었고. 냄새를 맡았는지 불에 가까이 다가오려는 알파인은 잽싸게 잡아채 콧등을 톡톡. "위험해," 그렇게 속삭이며 입을 맞추고 내려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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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유의 무미건조한 입맛 덕분인지, 음식에 버터가 과하게 들어가면 곧장 기민하게 알아차리고 '너무 느끼하지 않아?'라고 말대답하던 걸 기억하는 건지. 쌀알보다 월등히 많아 보이는 채소를 뒤로 한 채 그가 끌고 가는 대로 발을 옮겼다. 갈릭 특유의 달면서도 매콤한 향과 버터가 섞인 소스를 한 스푼 떠서 입에 넣곤,) 딱 적당해. 여기서 버터를 더 넣어버리면 야채향을 다 덮어버릴 거야. ('마늘도 적당하고.' 열중인 그의 등을 톡, 톡 건드리고. 꿈적하지도 않는 그가 야속하게 느껴져 손으로 뺨을 돌려 입술을 짧게 맞췄다.) 엄청 좋아. (적당히 지글거리는 밥알 위로 잘게 썬 채소들을 뒤섞어 볶곤 팬의 손잡이를 쥔 채, 앞쪽으로 살짝 밀었다가 몸으로 당기며 속 재료들을 위로 둥글게 튕겨 올렸다. 나름대로 조심하느라 무척 낮은 높이로 두어 번 회전시키곤,) 꼭 이런 걸 보면 하고 싶단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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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꾸만 제 등 톡톡 건드려오는 것에 혹여 실수를 할까 돌아보지 않다가 그가 뺨을 잡아 입을 맞추면 그에 녹아들었다. 마치 셰프들이 그러하듯 재료를 툭툭 튀게끔 팬을 돌리면 귀엽다며 웃음을 터뜨리고. 잘 끓은 라이스가 다 불어버리기 전에 불을 끄고 거품이 잦아들 때까지 기다렸다가 볶은 라이스와 계란 스크램블한 것이 뭉게뭉게 섞이도록 저어 주고는 그릇에 옮겨 담았다. 양이 좀 많나 싶어 갸웃대다가.) 맥주 꺼내 와, 여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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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 야채라서 괜찮아. 이 정도면 금방 먹어. (아마 반 이상은 제 입으로 들어가겠지만. 웍을 손목 스냅으로 회전시키는 연습은 나중에 제대로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냉장고 문을 열었다. 별무늬가 그려진 하이네켄 두 캔을 옆구리에 끼고 돌아오면 그새 플레이팅까지 제대로 끝마친 지 오래였고.) 고생했어. 당신. (여전히 셔츠 한 장 차림인 그를 힘껏 끌어안았다가 놓아주곤 맞은편에 가 앉았다. 모처럼 평화롭고 차분한 저녁 식사에 발 담글 준비를 끝마친 채, 한 손으로 맥주캔을 따 그에게 건네곤.) 예전 주량은 어느 정도였어, 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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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 무늬에 피식 웃고는 맥주 캔 받아들었고. 셔츠 한 장의 가볍고 어찌 보면 외설적인 차림으로 의자에 앉아 두 다리를 모았다. 별로 열심히 먹을 생각은 없이 제가 만든 요리가 보기에 그럴싸하단 감상으로.) 먹어봐, 응? (맥주의 맛보다는 시원함이 목구멍 타고 내려가면 입꼬리 기분 좋게 말려들었고 윗입술엔 거품이 묻었다.) 그냥저냥, 보통이었던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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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팔의 별은 단순히 페인트로 새긴 모양인지, 긴 세월 정비를 받지 못한 태를 고스란히 드러내며 희미하게 빛바래져 가는 중이었다. 볼록하게 솟은 필라프 꼭대기를 스푼으로 조심스럽게 떠서 입에 넣곤,) ……. 벅.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숙이며 허옇게 거품이 묻은 입가를 빤히 살폈다. 이내 혀를 내밀어 할짝대다가 씩 웃곤,) 엄청 맛있어. 특히 베이컨이랑 쌀이. (타지 않고 고슬고슬하면서도 짭짤해서. 곧바로 몇 수저 더 떠먹고는 그에게도 한 스푼 가득 떠서 내밀며 덧붙였다.) 건배도 안 하고 막 마시기야, 여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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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각하게 저를 바라보기에 혹여 맛이 없나 안절부절 못하다가 제 입술의 거품 훑어 가면 그제야 낯색이 밝아지고. 그가 내미는 필라프도 입 안에 넣고는 맛보다는 식감이 마음에 들어 고개를 끄덕였다.) 거기서 예의범절 교육을 안 시켜서 그래. (여상히 그가 들으면 웃지 못할 농담을 던지고 캔을 내밀어 짠, 건배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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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대는 잘 쓰던데. (이럴 땐 웃어야 하는데, 아마 백 년이 지나도 저런 식의 농담엔 익숙해지지 못할 것 같단 말이지. 씁쓸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단숨에 맥주를 들이켰다. 따끔따끔하면서도 시원한 목넘김은 처음 마셨을 때도 썩 나쁘지 않게 느껴져서.) 다음엔 아스가르드산 술이라도 가져와야겠다. (야옹, 울면서 제 다리를 벅벅 긁어대는 알파인을 위해 사료와 물을 그릇에 담아 내려주곤,) 네가 취해서 해롱거리는 걸 봐야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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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식사 예절을 가르치기엔 식사 자체를 할 일이 없었을 테니. 맥주의 목넘김이 좋아 연신 들이키다가 알파인이 제 발목에 꼬리를 감으면 손을 내려 살살 쓰다듬어 주었다. 필라프를 두 입 정도 더 먹고는 남은 것을 전부 그의 앞으로 밀어 주었다.) 취한 틈 타서 또 변태 같이 굴려고 하지.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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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건 맨정신일 때 당해야 더 기분 좋은 거야, 벅. (다음엔 오토바이 위나 차 안에서 괴롭힐지 고민하던 건 어떻게 알고. '조금만 더 먹어. 응?' 기어코 한 입 더 입에 넣고 나서야 그릇을 깨끗하게 비우며 맥주마저 남김없이 비웠다. 손을 뻗어 칭찬하듯 긴 머리칼을 쓰다듬어주곤,) 맛있었어. 고급 레스토랑보다 몇 배는 더. (설거지는 내가 할게. 작게 속삭이곤 가볍게 귓가에 입술을 댔다.) ……행복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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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우리가 이렇게 살게 될 줄 몰랐어. 정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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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생각인진 모르겠으나 귀 끝 붉어지는 것 보면 그렇고 그런 그림을 떠올린 것은 맞는 것 같아 뺨을 쿡 눌러주고. 맥주도 반 캔 정도 비우고 배가 불러 내려놓았다. 행복하냐는 물음에 소리 내어 답하는 대신 고개 끄덕이고 입술 맞댔다. 그가 설거지를 한다며 물러나면 거실에서 방패 모양 쿠션을 가져와 바닥에 얹고 그 위에 몸 웅크린 채 나른한 눈을 꿈뻑였고. 물소리와 고양이가 다가와 고롱대는 소리에 졸음이 밀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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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가 큰 두 성인 남성이 쓰기엔 다소 낮은 개수대였지만, 허리를 수그리면 그럭저럭 쓸만해서 굳이 바꾸고 싶진 않았다. 실은, 손때 탄 악기처럼 예스럽고 낡은 이 집이 자신들을 숨기기에 안성맞춤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서. 젖은 두 손을 수건에 문지르고 나오면 고양이 둘이 이불도 없이 웅크려 꾸벅꾸벅 졸고 있어서 웃음이 나왔고.) 배 보인다고, 버키. (쿠션 두어 개를 들뜬 등허리에 받쳐 주곤, 족쇄 대신 제 다리를 몸뚱이에 얽어 나란히 누웠다. 무른 눈꺼풀 위로 입술을 누른 채,)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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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덕분에 행복해,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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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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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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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청 푹 자던데. 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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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이 피곤했나 보네. 잘 쉬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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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잘 쉬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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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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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나서 가볍게 운동하고, 식사 준비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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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잘 때 뭐라고 하는지 잠꼬대 듣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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껴안고 사랑한다고 하면 뭐라 대답하는 게 정말 귀엽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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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있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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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뭐라고 대답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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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잠꼬대 안 하는데 네가 나 놀리는 거 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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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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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해, 버키.'라고 했더니, 네가 글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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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라고 했지, 일단 바보라는 소리가 제일 많이 나왔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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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다음이 '더 해 줘.'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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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짓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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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어내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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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넌 가끔 숨을 엄청 크게 쉬어. 자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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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이야. 나 거짓말 못 하는 거 알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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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거짓말이라고 생각해, 응? 이런 걸로 안 속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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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몰랐는데. 잠꼬대나 이상한 소린 안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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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끄러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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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잠꼬대하긴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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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이야. 이렇게 귀에 대고 작게 속삭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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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겋게 물든 귓불을 입술로 물고 늘어진 채로,) '더 불러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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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라고 잠꼬대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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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갛게 열 오른 귓가에 뜨끈한 숨결이 닿으면 머릿속 온통 뜨거워져 어지러워지고.) ..... 으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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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 말라고 자주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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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하다고도 하던데. 그건 내 말버릇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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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할 정도로 뜨겁네. 반대쪽 손으로 관자놀이를 감싸 머리를 끌어왔다. 귓바퀴를 윗입술로 부드럽게 훑다가, 골 부근을 혀로 진득하게 핥아 올리고,) ……부끄럽네. 들키기 싫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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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자꾸 멀어지려 들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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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지럼증이 자주 찾아오는 게 혹여 그를 불안하게 만들까 싶어 흐리멍덩한 시야 개도록 눈꺼풀 연신 여닫았고.) 꿈 속의 내가 네게 못되게 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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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목이 마른 건 아닌가, 싶어서 이마를 부드럽게 짚곤,) 열이 좀 있는데……. (협탁에서 물컵을 끌어와 입가에 대어 주곤 시선을 맞췄다.) 말하기 힘들어. (볼과 눈가를 연달아 입술로 누르곤,) 괴롭힌 건 아니야. 사실인데 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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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무슨 말을 했는데? (어째 상처를 받은 것 같아서. 뜨끈하게 부어오른 혀를 움직여 묻다가 밖으로 내어 그의 뺨과 입술을 훑었다.) ...... 좀 더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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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6월이잖아. 초여름이니까. (브루클린은 원래 일교차가 컸으니까. 낮엔 끓듯이 뜨겁다가 저녁엔 언제 그랬냐는 듯 서늘해지고. 손가락 끝을 컵에 밀어 넣어 적시곤 그의 발간 입속에 얕게 밀어 넣었다.) ……. ('차라리 고의였으면 더 나았을 거야. 실수로 놓친 건 너무 비겁하잖아.' 그런 소릴 그대로 읊어주고 싶진 않아서.) 말 안 할래. (쪽, 소리 나게 한 번 더 입술을 포개곤,) 네 꿈 얘기부터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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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분감이 스민 손가락이 입 안에 밀려 들어오면 분홍빛 입술 모아 빨아들였고. 얼굴이 죄다 발개진 게 더위나 부끄러움 때문만이라고 하기엔 몸이 절절히 끓는 것 같아서.) ...... 나쁜 애 만났나보네. (절대 버키 반즈가 하지 않을 말을 골라 스티브의 잠을 방해하는. 그의 뺨을 꼬집어 주욱 당겨 보고.) ...... 꿈. 무슨 꿈 꿨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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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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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감기라도 걸린 건가. 아니면 몸살일 수도. (슈퍼 솔저인 이상 잔병치레 같은 건 없어야 정상이겠지만, 정신적인 문제가 신체에 얼마나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 슬슬 실감하고 있던 터라. 죽 늘어나는 바람에 굳은 입매가 못나게 휘어졌고.) …너 아니야. 내가 나한테 하는 소리야. (손등을 이마에 올린 채 남은 손으로는 손부채질을 이어 나갔다.) 내가 뭐 했는데? 나쁘게 굴진 않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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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죽 늘어나는 그의 뺨을 재미있다는 듯이 늘여 보다가. 슈퍼 솔져라 그런지 손부채질만으로도 시원한 바람이 만들어져 눈 동그랗게 떴다.) ...... 나한테 이상한 서랍장을 사자고 했어. (그걸 사자며 엉겨붙고 필살기인 울먹울먹한 눈까지 꺼내드는 바람에 "그래," 하고 대답하려는 순간 잠에서 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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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월넛으로 만든 데다 상감이 근사한 엔틱풍 서랍장이었어? (최근에 단말기로 중고 경매 사이트에 드나들며 자주 보던 게 아닌가 싶고. 북마크 같은 고급 기술은 모르니 웹사이트 주소를 외우는 걸로 해결했는데. 찰흙처럼 마구 주물럭거리는 손등을 찰싹 때리곤,) 말 나온 김에 액자나 하나 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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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풍스럽고 예쁜 걸로. 어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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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등 찰싹 때리면 아야야, 하고 손을 뗐고. 빈티지 서랍장이었고 푸른빛으로 무늬가 들어간 모양새였는데...... 어째 휴대폰을 들여다 보며 가구를 자주 찾아보는 것 같더라니.) ...... "예쁜" 걸로. 고풍스러운 것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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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위 있는 귀족처럼 생긴 얼굴로, 중세 시대는 싫다는 소릴 하고 있으니 웃기지 않을 리가. 빙글빙글 웃으며 제 단말기를 넘겨주었다. 그가 먼저 찾고, 제가 반대하고. 다시 제가 찾아오는 걸 그가 거부하고……. 그러다 합의점을 찾는 게 일상이었으니까.) 넌 네 단……. '스마트폰' 안 써? 그때 줬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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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양이 귀 사면서. (자동으로 연결되어 있던 계좌로 사고는 다시 열어보지도 않았던 것 같다. 바깥 소식에 구태여 관심을 가지는 편도 아닌 데다 그와 있을 때를 제외하고는 잠을 자며 시건을 보내니.) ...... 이건 어때? (깔끔한 직선으로 이루어진 진녹색 서랍장은 나름대로 '고풍스러운 색'으로 합의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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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계좌 맞아, 그거? (아닌가? 고개를 기울이다가 그가 보여준 화면을 빤히 들여다보곤.) ……70점. (녹색은 배치하기 까다롭단 말이야. 흰색 벽지라면 모를까, 무늬가 있으면 어색해 보일 것 같아. 고개를 가로젓곤 비교적 장식이 덜한 이케아 원목 서랍장을 골라 그에게 보여주었다. 손잡이가 없이 밑단에 홈이 파여 있고, 색이 초콜릿빛 고동색인 걸 빼면 그럭저럭 깔끔한.) 난 이거. 어때?
buck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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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야? (그가 준 휴대폰에 연결되어 있었던지라 아무 생각 없이 구매했는데 혹여 실수를 했나 싶어 눈이 불안하게 굴러갔다.) ..... 뭐어? (칠십 점이란 말에 약이 올랐는지 눈꼬리를 날카롭게 세웠고 무늬는 아까 네가 말한 것에도 있지 않았냐며, 하는 억울한 낯이 되었다.) ...... 육십오 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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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동색 그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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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튼도 진갈색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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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퍼가 세팅하고 나서 그대로 전달했던 것 같은데. 아마 맞겠지. 신경 쓰지 마, 벅. (설마 남이 쓸 휴대폰에 다른 사람 계좌를 연결시켰을까. 그럼 구매 내역까지 전부 알게 될 텐데. 안심시키듯 말랑한 뺨을 부드럽게 비벼주며 입꼬리를 끌어올리고,) 같은 색 샀다고 30점이 넘게 까일 일이야? 통일성을 줄 일이지. (투덜거리며 '그럼 네가 골라 봐라'하며 건네곤,) ……이젤도 갈색 말고 다른 걸로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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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말고, 언젠가.
buck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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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응. (데굴데굴 굴러가던 눈을 가만히 두고서 다시금 화면으로 눈을 돌렸다. 설마 고양이 귀며 장난감에 속옷을 구매한 내역이 어디에 보여지진 않겠지.) 이것 봐. 웃기게 생겼어. (가구 란에 들어가보니 별의별 게 다 있었고 마침 조랑말이나 기린 모양의 의자도 눈에 띄었다. 아무래도 어린이용인 것 같았지만.) ...... 이젤도 지금 골라 볼까? 요즈음은 갈색 아닌 게 나올지도 모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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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야, 이런 것도 있어? (목이 긴 건 작은 미끄럼틀인 모양이었고. 고양이인지, 사자인지. 아무튼 귀가 뾰족하게 올라온 스툴처럼 생긴 건 저도 흥미가 가서 한 번 눌러보았다.) 알파인이 쓰라고 하나 둘 수도 있지. 그러잖아도 바닥은 불편해하던데. (꼭 의자나 침대 위로 바동거리며 기어 올라와 몸을 둥글게 말곤 했으니까. 그의 말엔 잠시 입을 열었다가, 그대로 닫곤.) 그래도 되나? (어릴 땐 가지고 싶어도 손에 못 넣었는데. 막상 군인의 길을 걷고 나서 사는 건…….) ……취미치고 돈을 너무 많이 쓰는 것 같아서.
buck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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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알파인이 아닌 저희 둘이 놀며 쓸 것 같지만. 함께 있으니 정신연령이 낮아지는 건가 싶었고.) 그래도 돼. (사실 제 돈이 아닌 것으로 된다 안 된다를 논하는 것도 우습다지만 스티브는 나라와 세상을 구한 영웅이 아닌가.) 찾아 보자. 미술 용품을 따로 파는 곳은 없나? (그가 자주 빈티지 용품을 검색하던 사이트에 '붓'을 검색해 보면 잘은 모르지만 유명한 사람이 쓰던 것이라는 설명도 붙어 있었고.) 한 번 살펴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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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삼. 20세기 때도 저는 조금 음침하고 예민한 구석을 빼면 세상 다 산 것처럼 구는 애늙은이였고 그는 십 대 소년가장이었지만, 둘이 함께할 땐 그저 철없는 꼬맹이 둘에 불과했다. 전장에서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엔 아직 부족하단 말이야. (이럴 줄 알았으면 학원이라도 다녀볼걸. 나이 든 노인을 상대로 하는 클래스가 분명 있을 텐데. 중얼거리며 마지못해 몇 가지 화도구를 검색해 보곤,) 다른 건 몰라도 그림 도구는. (낮은 목소리를 조금 더 작게 낮춰 그의 귓바퀴에 대고 속삭였다.) 새 걸로 사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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널 그려야 하니까. …….
buck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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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열 올라 있는 귓가에 숨결과 나긋한 음성이 맴돌면 저도 모르게 숨을 멈추었다가. 예전에도 자주 이랬다. 그가 갑자기 제 범위로 침범해 들어와 몸을 욱여넣고 가까운 곳에서 붉은 입술로 무언가 종알대면 심장이 빠르게 뛰는 것을 얼른 잠재우고 아무렇지 않은 척 하려 했던 게.) 그, 그럼 새 거. (예전에 자주 눈여겨 보던 브랜드들의 이름을 검색해 나가면 '윈저 앤 뉴튼'은 여전히 잘 나가는 것 같았고. '퍼머넌트 피그먼트' 따위의 브랜드는 어째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 같았다.) 우와, 색연필이 100개나 들어 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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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쑥스러워서 작게 속삭였을 뿐인데. 그야 자신은 확실히 빈티지 마니아 기질이 있긴 했지만,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최대한 맞춰 주고 싶었고, 제 손길을 탄 미술도구를 활용해 제대로 된 초상화를 그려주고 싶었으니까. 그가 식은땀을 흘리며 딴청을 피우는 것을 보곤 어깨 위에 턱을 얹은 채 손을 뻗었다.) '리퀴텍스'? 이건 신생 브랜드인가? 나라면 회사 이름을 이렇게 짓진 않았을 텐데. (홀베인 같은 건 영 끌리지 않았고. 그가 고른 색연필과 수채화 물감을 하나씩 담곤 이젤을 탐색해 내려갔다. 요즘은 알루미늄으로 된 조립식이 대세인 듯한데…….) 그래도 원목이 좋아, 난. (비교적 산뜻하면서도 단단해 보이는 흰색 이젤을 그에게 보여주었다.) 어떻게 생각해, 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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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은 안 통하거든, 바보야. 마치 강아지 예뻐하듯이 그의 턱 간질이고는.) 이 잉크 회사는 새로 생긴 건가. (그에게 선물하려 몇날 며칠을 뜸 들이다 결국 건네지 못한 만년필을 떠올리고. 고급스러웠지만 아주 하이엔드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붓과 물감을 좋아하는 그와 달리 저는 사각이는 펜과 잉크 구경하는 것을 좋아했으니까. 스티브가 알면 사주려 들까 싶어 싫어하는 척 했지만. '해리 포터' 컨셉이라는 잉크를 구경하다 다시 이젤과 캔버스를 검색했고.) 그거 예쁘다. ...... 햇살 받으면 좋을 것 같아. 창가에 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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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난삼아 '멍' 소리 내며 그의 칼라 깃과 초커 목걸이 끈을 아프지 않게 물어 당기곤,) 네가 펜을, ……. (좋아했던가, 티를 내지 않았을 뿐이었나. 예전부터 독서를 좋아했고, 유쾌하고 가벼운 겉모습과 달리 남다르게 감정이 섬세한 편이었고. 새로운 것이라면 눈을 빛내며 제 손을 이끌고 찾아가곤 했으니까. 어쩌면.) 작가가 되는 것도 어울리겠다. (서점에 가면 저들에 대해 멋대로 떠들어 둔, 나무가 아까운 쓰레기들이 넘쳐나는데, 네가 우리 일대기를 써 준다면 그것보다 더 진실한 이야기도 없겠지. 이젤을 망설임 없이 장바구니에 담곤 '몽블랑'이라 적힌 탭에 들어가 스크롤을 내렸다.) 필명으로 내면 되니까. (이름을 각인할 수 있다는 설명을 훑다가 청회색 눈동자를 들여다보며,) 이건 어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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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빛 가닥들을 헝클어뜨리며 다음엔 정말 강아지 귀를 사야겠다, 하는 변태 같은 생각을 하다 이내 뒤로 미뤄내고.) 좋아하는 거 아냐. ("이건 너무 비싸," 하며 그의 손에서 휴대폰을 빼앗으려 들었고. 애초에 자주 멍청해져 자신의 이름조차 잊는 녀석에게 이렇게 비싸고 좋은 필기 도구가 어울릴 리가.) 네 색연필 뺏어서 쓰지 뭐. (옛날에도 그에게 나름 좋다 하는 물감이나 색연필을 선물해 주고 나면 그가 그것을 쓰는 모습이 좋아 눈 초롱초롱하게 밝히며 구경하다 "너도 써봐," 하고 내미는 것엔 손사래를 쳤었다. 제 손엔 어울리지도 않았던 데다 망가뜨릴까 겁이 나서. 이제 와서 그의 것에 손 댈 생각은 없었지만 장난 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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싫어. 색연필은 사용법부터가 다르다고. ('물에 묻혀서 쓴다는 건 알아?' 종알대는 건 그 옛날과 다를 바가 없어서 기시감마저 느껴졌다. 자신은 그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하다못해 좋아하는 음식 취향조차도 모른다는 게 억울하고도 분하게 느껴져서. 좀 더 얘기해 볼걸. 아주 오랫동안, 밤이 샐 때까지 네가 좋아하는 것과 즐겨 하는 것, 네 관심사와 최근에 사귄 여자 친구와 뭘 했는지까지 시시콜콜하게 따져 물을 걸.) 어디 한 번 뺏어보든지. (재빠르게 반대편 팔로 옮기며 빠르게 주문 창을 터치했다. 새겨넣을 이름엔 'Bucky Barnes'라고 어김없이 작성하곤,) 내가 주고 싶어서 그래. 응? (말릴 틈도 없이 뺨을 감싸고 입술을 포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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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아아니. (두 팔을 휘적휘적대며 손을 뻗고.) 몽블랑은 너무 아저씨 같, ...... (실제로 몽블랑 만년필은 비싸고 중후한 인상이 강해서. "게다가 너 그거 닙 사이즈도 모르고, ......" 꿍얼꿍얼대며 아예 구매 버튼을 누르려는 엄지를 제 입술로 가져와 물었고.) 색연필이 그냥 색연필이지. 물에는 왜 묻히는데. (언제 한 번 그가 사용하는 것과는 딴판인 브러쉬 세트를 사왔다가 한두 시간 즈음 잔소리를 했던 기억도 떠오르고. 그게 뭐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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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화용 대신 수채화용을 사 온 사건을 말하는 거라면, 할 말이 많고말고. 그야 둘 다 어마어마하게 비싼 건 알지만. 인조모로도 충분한데 굳이 담비 털을 고집한 이 녀석이 바보였지만. 기왕 비싼 거라면 보편적인 호수를 샀어야지. 어디 써먹지도 못할 평붓을 사 와선……. 엄지로 말랑한 혀끝을 갉작대다가 코끝을 맞대곤,) 원래 색연필은 물에 녹여서 여백을 채우는 용도란 말이야. 그래야 농담을 표현할 때……. (문득 놀란 듯 눈을 크게 뜨곤,) 만년필에도 사이즈가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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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거기 아저씨가 이게 좋다고 했단 말이야," 하고 항변하면 바가지를 썼다며 노발대발하며 제 손모가지를 끌고 가게에 싸움을 걸러 갈 것 같아서. 그것도 거짓말로 치는 건가?) 그럼 왜 '연필'인데. 원래 연필은 그냥 쓰는 건데. (괜히 꿍얼대며 그의 콧망울을 잇새로 앙앙 물어 보다가.) 그럼 당연하지. (신이 나 휴대폰을 가져오는 모양새는 '좋아하는 게 아니'라며 손사래 치던 것과는 영 딴판이었고. F사이즈부터 B사이즈까지 있으며 획의 굵기를 조절해 마치 타이포그래피처럼 쓸 수 있는 펜촉도 있다며 설명을 늘어놓았고. 잉크를 충전하는 법도 다 다른 데다가 배럴이 마블링이 되어 예쁜 것도 있다며 조잘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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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너구리가 너구리랑 다른 것과 비슷한 거지. ('알을 낳잖아.' 젖이 발달하긴 했지만. 부러 놀리듯 가슴을 엄지로 꾹, 꾹 눌러대다가 그가 신나게 조잘대는 것을 보면 눈이 휘둥그레진다.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모습에 저마저 들뜨는 기분이었고. 사실대로 고백하자면 반은 못 알아들었다. 배럴이 뭔데? 하지만, 모처럼 들뜬 그의 말을 가로막으면서 들을 만한 가치가 있는 것 같진 않았으니까.) ……F가 4B연필 같은 거구나. (가장 기초가 되는 표준 규격으로 이해하곤 고개를 주억였다. B 사이즈로 체크되어 있던 펜을 슬그머니 바꾸곤,) 검은색 말고, 사고 싶은 잉크가 있어? (흘러내린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겨주곤 부드럽게 눈을 맞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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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너구리나 너구리나 너구리인 거지 뭐. (저도 억지를 부리고 있는 건 알았지만. 제 가슴 눌러오면 얼굴 화다닥 달아올라선 손등을 찰싹.) 아아니. 4B는 진한 정도고. (이건 촉이 갈라지는 정도에 따라서 글자 획 굵기가 달라지는 거라며 종알종알. 이건 뚜껑을 돌려 열어야 하는 거고 저건 뒤에 있는 버튼 같은 걸 꾹 눌러서 잉크를 빨아들일 수 있다며 혼자 재잘대다가 숨이 찰 즈음 제가 너무 신이 났나 싶어 얼굴 분홍빛으로 달아오르고.) ...... 좋아하는 거 아니라니까. 안 살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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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그렇구나. 안 살 거구나. (설명까진 귀담아들었지만, 쓸데없는 사족은 건성으로 흘려듣고 당연하게도 좀전의 사이트를 다시 뒤적이던 차였다. 아무리 이쪽 방면으로는 문외한이라고 해도 워터맨과 파커까진 들어본 것도 같다. 코난 도일이 듀오폴드를 사용했다는 사실도.) 입문용으로는 일제도 나쁘지 않다고 하네. 몽블랑이 그렇게 늙은 이미지인지는 몰랐는데. (근데 우린 늙은이 맞잖아. 장난스레 톡 던지며 그가 말한 것을 참조하다가 고개를 가로젓곤,) 같이 사자. 네가 내 이름이 각인된 걸 가지면 되잖아.
buck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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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에 헤밍웨이가 쓴다며 홍보물을 내걸던 몬테그라파도 있겠고. 하지만 비싼 것을 사용하는 취미는 없었던 데다 중후한 이미지의 고급 라인도 그닥이었기에. 게다가 공부를 아예 손에서 놓아버린 이후로는 더더욱 만질 일이 없는 도구였다.) ...... 아, 알았어. (안 산다고 버티면 또 울먹거릴 것만 같아서. "대신 몽블랑은 안 돼. 비싸다고." 그렇게 말하면서도 몽블랑의 에디션 중 고흐를 모티브로 했다는 놈에게는 눈도장을 찍어 두었다. 대신 입문용으로 좋다는 일제 펜들을 둘러보기 시작하고.) 넌 너무 얇은 글씨는 안 좋아하니까, 좀 굵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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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스터즈 오브 아트라, ……. (거창한 이름을 되뇌며 씁쓸하게 웃곤. 세상 어딘가엔 캡틴 아메리카를 모티프로 한 펜 따위도 있겠지. 밤하늘을 고스란히 담은 듯한 남색 몸체는 저 역시도 꽤 마음에 들어서. 빙그레 웃곤 그의 어깨에 머리를 완전히 기댔다.) 우리 둘 다 힘 조절 연습도 해야 하니까, 아마 괜찮은 도구가 될 거야. (그가 학업을 포기한 것을 누구보다도 안타까워하고 분노하던 자신이었기에 더더욱, 다시 그의 손에 필기구를 쥐여 주고 싶기도 했다. 심혈을 기울여 찾아보는 옆얼굴을 실컷 훔쳐보다가.) 난 안목 없으니까 네가 같이 사 줘, 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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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캡틴 아메리카가 아닌 스티브 로저스를 표현한 펜이 있다면 당장 살 텐데, 싶어 희미하게 웃고. 제가 좋아하는 그의 금빛과 새파람을 모두 섞어 놓는다면 그 무엇보다 눈에 띄는 모습이겠지.) 안목이 없기는. (아저씨 같다고 핀잔을 주긴 했지만 스티브는 아름답고 가치 있는 것을 시선으로 잡아내는 재능이 뛰어났다. 결국 오래된 것을 좋아하는 그의 성정도 가치 있는 것을 중요시하는 것과 맞물려 있는 것이겠지. 몸체가 회빛과 푸른빛으로 마블링이 되어 있고 캡은 말끔한 먹색인 펜을 보여 주며.) 이건 어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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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다. (그가 보기에 자신은 이 정도로 반짝거리는 느낌인 건가. 꼭 '별이 빛나는 밤'처럼. 누가 누구더러 콩깍지라는 건지.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둘 다 초심자니까 너무 비쌀 필요는 없겠지. 망가뜨릴 수도 있고. (천천히 살피다가 은색 몸체와 검은색이 들어간, 비교적 단순하면서도 세련된 느낌을 주는 디자인을 발견해 그의 옷깃을 가볍게 잡아당겼다.. 언젠가 금보단 은색을 좋아한다고 말했던 것도 같아서.) 벅. 이거 너 닮았어. 파커 사의 소네트래. (이내 옆구리 쿡, 검지 세워 찌르곤,) 내 이름은 네가 새겨 넣어. 뭐라고 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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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정한 배럴에 비해 은빛 캡에는 음각으로 장식이 들어간 데다 트림은 금빛인 게. 어째 젠체하면서도 수더분한 인상을 주는 모순적인 펜이었다. 물론 예뻤지만......) 이게 어딜 봐서 날 닮았어. (제가 고른 펠리칸과 소네트를 모두 담으니 몽블랑은 아니랄지도 꽤 가격이 나가서 눈을 굴렸다. 집 안에만 있는 것에 여지껏 별 감흥이 없었지만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느껴서. 일을 할 방법을 찾아봐야 하나 싶었지만 가진 것도 할 줄 아는 것도 몸 쓰는 법 뿐이라 집을 벗어나지 않고서 할 수 있는 일을 생각해 내기 어려웠다.) "Pu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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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하면서도 요목조목 뜯어보면 섬려하고 예쁜 게. 그러면서도 전체적인 분위기는 날카롭고 차가운 느낌마저 드는 게 딱 버키 반즈인데 새삼. 왼팔이 기계가 된 데다 동공이 조금 더 벌어진 탓인지, 전보다 더 서늘한 인상이 더해졌지만.) 그럼 나도 멍청이로 바꿔야 하나. (목에도 반지에도 이름표를 걸었으니, 하나쯤은 별명으로 적어도 괜찮겠지. "Jerk." 그렇게 고쳐 놓곤 한꺼번에 주문을 끝낸 채 그를 덥석 끌어안아 뒤로 눕혔다.) 일하지 마. 다른 사람이랑 부대껴 있는 거 보기 싫어. 응?
buck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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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난으로 던진 걸 진심으로 주문해버리는 것을 말리지도 못한 채 당혹스런 낯을 하다가 이내 푸슬푸슬 웃음을 터뜨렸다.) 비싼 펜에 누가 이런 이름을 새기느냐고 당황하겠네. (뒤로 풀썩 넘어가 그를 올려다본 자세가 되고. 제 생각을 어찌 읽었는지 삐죽대며 일하지 말라 하는 게 귀여우면서도 어이가 없어서.) ...... 안 부대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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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부대끼고 어떻게 일을 해. (보나 마나 몸 쓰는 일 할 게 뻔한데. 응? 단단하게 힘이 들어간 복근을 검지로 쿡쿡 누르다가 가볍게 입술을 겹쳐 누르곤,) 넌 이미 어릴 때 충분히 많이 일했어. 70년 동안 일만 했고. 보상도 못 받고. (그러니까 이젠 내가 일할래. 응? 옆구리를 세게 끌어안고 뺨을 마구 비벼댔다. 긴 머리칼이 흐트러지는 것이 보기 좋아 품에 파고들곤,) 뭐부터 쓸 거야? 네 이름?
buck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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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땐 다들 그만큼 일했어. (힘든 시기였고, 병들지 않은 사람들은 모두 노동을 하거나 군에 끌려갔으니까. 베카나 스티브에게 포댓자루로 만든 옷을 입히고 싶지 않아 더욱 일에 시간을 쏟았지만 모두의 주머니가 넉넉지 않아 일급이 밀리는 날도 다수였고.) ...... 글쎄. (사소한 걸 쓰고 싶다. 중하지 않은 것. 무겁지도 진지하지도 않은 것. 돌이켜보며 웃을 수 있는 일상의 기록이나, 시덥잖은 헛소리를 쓰고 싶다는 생각에.) ...... 낙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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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랬지, 나 빼고. (거의 장애인에 준하게 취급받던 자신 정도나 논외였지. 덕분에 계집애처럼 말랐다는 소리나 듣고. 분하다거나 화가 나진 않았지만, 그저 자신이 제 몫을 못 할뿐더러 친구에게 짐덩이나 다름없다는 사실이 미치도록 싫었고.) 그래도, 아무 데서나 일하다가 잘못되는 건 싫단 말이야. (몸도 아프고 왼쪽 어깨도 아직 힘들잖아. 최소한 정비는 받고 나서. 응? 가슴팍에 이마를 박았다가 떼곤,) '멍청이와 풋내기' 같은 거?
buck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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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 충분히 열심히 싸우고 있었어. (누구나 무기력해졌을 테고 죽음 앞에 두려움에 떨었을 병마에 맞서 스티브는 단 한 번도 체념한 적이 없었고 언제나 그 누구보다 치열했으니까.) ...... 알았어. 그래도...... (뭐라도 쓰임이 있었으면 좋겠다. 전처럼 선물을 준비해 깜짝 놀래켜 주며 그 당황스러움과 기쁨으로 반반 물드는 얼굴을 구경하고.) 글쎄. 그것도 좋고. 알파인의 행동 관찰일지 같은 걸 쓴다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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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집이나 식당까진 봐 줄게. 너 요리 잘하잖아. ('버키 빵 같은 걸 상품화하면 될 거야.' 샘이 저더러 종합격투기 선수를 해 보라고 했던 게 생각나 소리 나게 웃곤,) 요샌 고양이들을 맡아주고 돈을 받기도 한다더라. 희한하게 동네 고양이들이 넌 좋아하는 것 같으니까……. (같이 산책을 나갈 때도 버키만 발견하면 졸졸 따라다니던 녀석들도 있었고. 그새 그의 흰 무릎에 머리를 올리고 가릉거리는 알파인을 한 번 쓰다듬어 주었다.) 네 이야기라면 뭐든 재밌을 것 같아. 일기를 써볼 수도 있겠고.
buck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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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도 못 느끼는데 간 못 맞춰서 혼날 일 있어? ('버키 빵'은 또 뭔데. 우락부락하니 못생긴 빵이려나.) 위험하게 고양이를 남한테 맡긴다고? 내가 누군 줄 알고. (사랑하는 고양이를 타인에게 맡겼다가 그 놈이 제정신을 잃고 집안을 난장판으로 만들고 동물을 해친다면. 알파인의 귀 뒤를 긁어주면 별로 섬세하지 않은 손길에도 좋다고 고롱대는 게 귀여워 고개 숙여 입 맞췄고. 그 새 심통이 난 강아지 얼굴에도 쪽.) ...... 재미는 무슨. 별로 할 이야기도 없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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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것 치곤 꽤 맛있었단 말이야. 수프도 그렇고, 필라프도. (감만으로 만드는 게 가능하던가? 몇 달이 지나도록 거의 잃어버린 미각은 돌아올 기미를 보이지 않아 안타까웠지만. 가벼운 입맞춤을 돌려주듯 고개를 맞댄 채 부드럽게 혀를 써서 입술을 겹치곤,) 네가 누구긴, 고양이 왕자 같은 거겠지. (여전히 제 손길 대신 버키의 손길만 타면 약이라도 맞춘 듯 나른하게 하품하는 고양이를 빤히 살폈다. 요령이라도 있는 건가. 본능적으로 자신에게 더 잘해주는 주인을 알아본다거나.) 그때, 공장에서 가져온 일기 있잖아. 그것도 비슷한 거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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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 왕자는 무슨. ("네가 가끔 질투해서 그렇잖아," 하고 콧망울 톡톡. 공장에서 가져온 일기에는 알아볼 수 없는 글도 꽤 있었다. 하이드라가 주입한 여러 언어가 뒤섞인 건지 그걸 쓴 저도 이게 뭘 표현하려 한 건지 모를 때가 많았고.) 그거 제임스는 읽을 수 있으려나? (어깨 으쓱이고. 쓴다 해도 제 글을 읽히고픈 이는 스티브 로저스 한 사람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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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은 살피지 않았어도 그가 보여주었던 페이지는 대강 기억하고 있었다. 어떤 글씨는 컴퓨터로 인쇄한 듯 간격과 굵기마저 어긋남 없이 정교했지만, 어떤 건 환자가 휘갈긴 듯 불안정했고.) 그러고 보니 걘 요즘 자주 안 나오던데. (가끔 그가 멍한 얼굴로 몽유병 환자처럼 거실을 헤매기도 했지만, 적어도 제임스라면 대화는 할 수 있을 텐데.) 또 와도 된다고 했어, 난. 혼 안 냈단 말이야. (허리를 팔로 감싼 채 잘게 다독였다.) 바람피우는 거라고 생각하지 말고. 너라서 사랑하는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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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아. 안 서운해. (생각이 난 김에 침대 밑으로 밀어 두었던 가방을 빼내면 어째 먼지투성이에 지저분해서 콧잔등 찡그렸다. 빨아야겠다. 속에서 여러 권 중 하나를 꺼내들어 팔랑팔랑 넘기면 길거리의 노숙자인 줄 알아 누군가 손에 쥐여주고 갔던 샌드위치에 대한 감상이 적혀 있었고. 맛이 느껴지지 않고 어떤 것은 아삭하며 어떤 것은 물렁해 식감이 이상하다 생각했고 몇 시간 후 곧장 모두 토해냈던.) ...... 나오겠지. 어쩌면 삐쳤는지도 몰라. 네가 괴롭혔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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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언제, 나 안 괴롭. ('다른 좋아하는 사람이 있으면 거기에 맞춰주겠다'라고 했던 기억이 떠올라 얼굴을 붉게 물들였다가,) 잠시만. 그런 것도 서로 얘기하는 사이야? (남은 공책을 흘끔 보다가 한 권 집어 들어 그에게 흔들어 보였다. '나 이거 읽어봐도 돼?' 여상하고도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로,) 맞다. 벅. 족쇄 잠금장치가 고장 났던데, 어떻게 했는지 기억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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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롭혔잖아. (가끔 의식의 저 뒤켠에서 '쟤 못됐어, 이상한 집게도 있어,' 그렇게 꿍얼대는 목소리가 들렸는데 반응을 보아하니 역시 괴롭힌 게 맞다.) 응, 읽어 봐, ...... 뭐? (그러고 보니 발목이 가벼웠던 게, 그가 또 죄책감에 못 이겨 풀어둔 것인 줄 알았는데.) 기억, 안 나. (당혹감을 지워내지 못하고 제 발목을 감쌌다가. 정말 그가 가끔 장난조로 말했던 것처럼 부러뜨려 두기라도 해야 하나. 하지만 에셋은 두 다리가 다 부러져도 어떻게든 일어나 걸을 텐데. 생각에 잠겨 스스로 입술을 물어 간만에 살을 찢고 피를 냈음은 깨닫지 못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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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부림이나 저항의 흔적은 하나도 없이 깔끔하게 자물쇠만 망가뜨린 건 확실히 놀라웠지만. 역시 구형 잠금장치로는 한계가 있는 건가, 순간적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그래도 공격하진 않았으니까. 단지 답답하게 느껴진 걸 수도 있고. 주어져야 할 임무가 오랫동안 갱신되지 않아 딴엔 궁금했던 걸 수도 있겠고…….) 버키. (익숙한 혈향이 코끝을 찌르자, 대번에 피범벅이 된 입술을 엄지로 누르며 턱을 치켜올렸다. 화가 났다기보단 그저 진정시키려는 듯 차분한 어조로,) 괜찮아, 예상 못 한 것도 아니고. (천천히 손을 올려 머리를 쓸어 만졌다.) 네가 다치지 않았으면 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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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처가 벌어진 곳에 이를 박아넣고 지근지근대면 그 아릿함에도 불구하고 머릿속이 아득해져 오랫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고.) ...... 예상을 못한 게 아니라면서, 나더러. (저 구속구들을 치우자며 어리광을 부려대면서도 그러한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고. 이대로는 안 된다.) 이렇게는 안 돼.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한다. 발목을 부러뜨리든 귀를 뜯어내든 에셋을 깨워 아주 죽여버리든...... 아무것도 모르는 개새끼마냥 눈 굴리는 법 밖에 모르고 명령을 거스를 줄도 모르는 멍청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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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컹한 속살이 잇새에 으끄러지기 전에 손가락을 밀어 넣어 가로막곤 시선을 맞췄다. 동공이 열린 탓인지, 평소보다 몇 배는 흐릿한 빛을 띤 눈동자의 가느다란 떨림을 집요히 따라가다가,) 그런 거 해 봤자 금방 회복돼, 마음만 먹으면 통각도 무시할 수 있고. (네가 가장 잘 알잖아. 네가 불안해할수록 상황이 더 안 좋아질 거야. 저 역시도 만에 하나에 대비한 제어는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만, 그런 식이면 그를 짐승처럼 다루던 하이드라와 자신이 뭐가 다른가 싶고……. 거의 울 듯한 얼굴로 그를 응시하다가 뺨을 가만히 어루만졌다.) 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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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못 믿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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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믿어. (가쁜 호흡이 점차 가라앉아 색이 바랜 눈동자에도 초점이 돌아왔다.) ...... 하지만 더이상 안일하게는 안 돼. (몇 달을 큰 사고가 없었다고 마음이 가벼워졌던가. 제가 기억과 이성을 되찾으며 에셋도 함께 힘을 얻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왜 하지 못했을까.) 묶지 않고 자는 날은 없어야 해, 알겠어? (울 것 같이 일그러진 그의 낯이 시야에 들어오면 본능적으로 달래려 손을 뻗었다. 오른손에 감기는 살결이 보드랍고도 단단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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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어.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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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나도. (반쯤 고개를 틀어 제 얼굴을 감싸는 손바닥에 입술을 묻었다. 그새 싸늘하게 식은 손길에 도로 열기를 끼얹어주듯 몇 번이고 입술을 문지르며 눈꺼풀을 여닫다가.) 너한테 열쇠가 어디 있는지 알려줬는데, 못 들었나 보네. (단순히 암살하기보단 누군가를 보호하거나, 지키기 위해 목표를 제거해야 한다고 설명하면 몇 배는 효율성이 올라갔다고 하던가. 첨부된 사진 속 윈터솔져의 모습도 간부로 추정되는 이를 엄호하는 모습이었고.) ……어쨌든 너잖아. 그리고 속았다지만. (한결 차분한 기색으로 숨을 삼키곤,) …세상을 위해 좋은 일을 한다고 생각했다며. 말이 통할 수도 있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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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몰라. (머릿속에 그려지는 에셋의 모습은 멍청하게 커다란 눈알을 데굴데굴 굴리며 알렉스, 아니 피어스의 손길에 머리칼을 부벼대는 것이었고. 뺨을 맞아도 누군가 몸을 범해도 눈 깜빡이고 어린애 같이 신음하기만 하는. 그래, 안다. 스티브는 안쓰러워하겠지. 하지만......) 네가 다치는 게 싫어. 내 손으로, ...... (에셋과 제임스로 구분을 지어 뒀다지만 스티브의 말대로 그들 모두가 버키 반즈 자신이라면 더더욱 죄스럽다. 사랑해마지않던 이를 잊은 것도 모자라 총구와 칼날을 겨누었다는 것이.) ...... 싫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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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거겠지. 자기 자신을 극도로 혐오하다 못해 타인으로 분리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었던 거고. 점점 말이 짧아지는 그에게 더는 애써서 말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듯, 입술을 겹쳐 말문을 틀어막았다.) 안 다쳐, 난. (있는 힘껏 부딪혀도 안 부서져. 그러려고 살아남은 거야, 널 만나서 끝까지 지키려고. 세차게 뛰는 심장을 고스란히 내리누르듯 온몸으로 그를 짓누르다시피 껴안은 채,) 벅. (넌 내가 아프다고 해서 귀찮거나 싫었던 적이 한 번도 없었잖아. 옮을 것을 걱정하지도 않았고. 사랑한다는 건, 그 사람의 가장 수치스러운 부분까지 끌어안는 거라고.) 네가 알려줬잖아. (어린애를 달래듯 짧게 이마에 입술을 누르고 시선을 맞췄다.) 일단 족쇄부터 새로 사자. 알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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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를 아우르는 태엽 장치가 어긋나기라도 한 것처럼. 이럴 때엔 꼭 어린애가 말을 처음 배울 때 아무 단어나 던져 놓던 것처럼 몰라, 아니야, 싫어...... 바보 같아.) ...... 응. (울 것처럼 얼굴을 일그러뜨렸지만 그에게 안길 때엔 그렇게도 잘만 흘러나오던 눈물이 메마른 듯이. 반박할 말은 적지 않다. 태어날 적부터 몸이 약했던 데다 돌아서면 죽음과 마주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이겨내고 미약한 발버둥이나마 멈추지 않았던 그와 저는 다르지 않나. 하지만 입을 다물었다. 열었더래도 지금의 짤막하고 조각난 언어로 표현할 수 있을 리 없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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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종종 이성을 잃고 제 목을 조르는 상황은 슬슬 적응해 가던 차였고, 헬리케리어에서 죽일 듯 달려들던 그때도……. 실은 그다지 무섭진 않아서. 겁에 질린 듯한 눈망울과 그의 얼굴을 겹쳐 보며 어깨를 부드럽게 감쌌다.) 잘 나아지는 중이잖아. 말도 잘 듣고. 식사량도 조금씩 늘리고. 산책도 하고. (말이 끝날 때마다 칭찬에 방점을 찍듯 부드럽게 키스하곤 늘어지는 그를 깊게 끌어안은 채,) 원래 병이 좋아질 때가 있고, 나빠질 때도 있는 거야. (그가 알아들을 수 있을 만큼 천천히, 느리게 발음하며 입꼬리에 입술을 대곤,) 넌 내가 아팠을 때, 어떻게 견뎠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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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일어날 적에 그의 목덜미에 붉고 푸른 자국이 남아 있으면 그것을 아는 체 하는 것이 그를 더욱 곤란하게 만들 것을 알아서. 정확히 무엇이 나아지는 것인지 모르겠어서. 제 손바닥에 손톱 박아넣는 대신 셔츠 자락 붙들고 쥐어짜는 것은 새로 생긴 버릇이었다. 스스로를 다치게 하고 싶을 때마다 천자락을 쥐어 비트는 것.) ...... 견디지 못했어. (그가 아플 적마다 너무나도 괴로웠다. 낮에는 일을 나가 몸을 혹사시켰고 밤에도 그를 위한단 명분으로 타인에게 자신을 내어주었다. 그것을 '견딘다'고 표현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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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를 괴롭혀대는 것보단 차라리 셔츠를 구기거나 이불을 망가뜨리는 편이 나았다. 가끔 그가 자신의 머리를 쥐어뜯거나 손을 찌를 때면 살갗뿐만이 아니라 두개골 안쪽이나 내면까지 상처를 내는 듯한 기분이 들어서. 조심스럽게 고쳐 안곤 무릎 위로 몸을 올려 가볍게 고쳐 안곤,) 그랬구나. (목덜미부터 어깻죽지까지, 그가 함부로 다룬 몸뚱이 하나하나에 경건하게 입을 맞춰 나가곤,) 그러면 난 널 보면서 견뎌야겠네. (나직이 토닥이며 귓가에 입술을 묻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사람인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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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갗을 베어 피를 낸 적은 없디만 머리칼을 쥐어뜯거나 입술을 무는 버릇은 여전했고. 생각해보니 별 지장이 없다면 스티브는 제 이를 죄다 뽑아버렸을지도 모른다 싶었다. 혀를 언제 씹을지 모르는 일이니까.) ...... 너도, ...... (아파? 그렇게 묻고 싶었다. 제 망가진 꼴을 곁에서 바라보아야 하는 그도, 그 때의 저처럼 괴로운지.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얼마나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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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야, 묶어두는 한이 있더라도 그런 과격한 짓은 안 해. (하나만 렌치로 비틀어도 통증에 두통마저 일 정도인데, 그런 짓을 사랑하는 사람한테 저지를 리가. 그야 입에 거품을 물 만큼 세게 혀를 깨물거나 비슷한 시도를 저지른다면 아마…….) 죽을 만큼 아파봐서 그런가, 이 정도면 괜찮다고 생각해. (비대한 육신으로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 채 목에 걸린 성조기에 서서히 숨이 조여들어 가는 삶보다야, 조금 생채기가 나더라도 서로 끌어안고 버티는 지금이 낫다고.) 원래 살아 있다는 건 아프다는 거잖아,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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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보다도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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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 내게 미래를 의미 있게 만든 유일한 존재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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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민했으면서. 눈썹 사이 조금 찌그러진 채 바라보다가. 어디를 얼마나, 어떻게 깨물어야 의식을 잃는지는 요령을 터득했으나 윈터 솔져의 회복력은 출혈이 과한 것을 넘어서 살아나는 속도가 죽어가는 것보다 빠른 듯 했다.) ...... 안 돼. (너는 행복해야 해. 최악보다 나은 것을 선택하려 웃음을 포기하면 안 된다니까. 그렇게 이어 말하려다가도 올바른 언어를 찾지 못한 혀가 입 안에서 헛돌았다. 봐, 이럴 때마다 깨물고 싶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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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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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졸려. 그래도 더 보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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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청 행복해. 벅. 정말이야. (네가 날 얼마나 기쁘게 만드는지 몰라서 그래, 버키. 만약 네가 내 착각이나 환각이라고 해도. 평생 이렇게 있겠다고 할 거야. 머리 뒤에 베개를 괴어 주곤 팔을 이불 아래에 밀어 넣은 채로,) 내 행복엔 네가 필요해. 말 그대로의 의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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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벅. 정말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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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상상한 로맨틱한 첫날 밤은 어떻게 진행됐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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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나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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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정식으로 사귀자고 제안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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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스부터 천천히 하고. 적어도 반 년쯤 지난 다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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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인 레스토랑이라도 데려가서 제대로 된 프러포즈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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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나서 좋은 호텔로 데려가서, 아프지 않게 천천히 만져줬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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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사람들은 그렇게 한다고 들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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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럼. 그렇게 해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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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보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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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시작한 방식도 나는 좋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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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랑은..... 보통 사람들 다 하는 것도 함께 해보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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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너무 특이하기만 했잖아. 짝사랑을 한 세기씩 하는 사람이 어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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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켰다. 사실 결혼식 올리기 전에 하고 싶었던 것들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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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신혼여행은 루마니아로 갈래. 그때 갔던 호텔도 다시 가볼 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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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트도 하고 싶단 말이야. 영화도 보고, 놀이공원도 가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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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은 서점에서 아무 말 없이 책만 읽어도 좋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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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원에서 네 그림 그리는 것도 괜찮을 것 같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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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든, 뭐든 너와 함께하면 분명 행복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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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행복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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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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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 곧장 주문했던 족쇄가 발목에 걸리적대는 것도 잊고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가 그 줄에 걸려 휘청댔다. 늘 유연하고 우아한 움직임을 구사하다 바보 같은 모양을 보여주었다 싶어 얼굴이 발개지고.)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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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긴, 우리 인생에 있어서 다음이 언제일 줄 알고. 휘청대며 뻗어오는 팔을 단단히 붙잡아 일으켜 세워 주곤 곧장 단말기를 켰다.) 어느 레스토랑을 가도 네가 만든 요리보다 더 맛있을 것 같진 않은데. (다음으로 생각난 것은 코니아일랜드였다. 지하철로 50분 거리, 차로 가면 더 빠를 거고.) ……지금 가면 불꽃놀이는 볼 수 있을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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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볼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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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만든 요리가 무슨 맛인지 저는 모르는 것은 둘째 치고 제대로 된 셰프가 요리한 것과는 차원이 다를 텐데. 휘청이다 그의 품에 안겨서 고개를 끄덕였다.) 옷, 옷 입을래. (지금 이 순간 만큼은 사람 좋아하고 밖에 나가는 걸 좋아했던, 살결이 부대끼고 어깨가 치여도 섞여 춤 추는 걸 좋아했던 버키 반즈처럼 신이 나서 그의 팔을 잡아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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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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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았어, 알았어. 우선 구속구부터 벗고 나서. (꼭 산책 나가고 싶어 하는 강아지처럼 구는 게 귀엽고도 안쓰러워서 가볍게 볼을 쓰다듬고 새 자물쇠―비밀번호 형태로 된―를 차례대로 풀어주었다. 3, 2, 5, 5…….) 됐다. (조금 부어오른 가슴팍에 꼭 맞게 붙어 차르륵 떨어지는 검은 셔츠를 입히곤 청바지를 건넨 채로,) 너무 어두침침한가? (얼굴이 환하니까 괜찮지 않나, 생각하면서도 저 역시도 파르스름한 셔츠 한 장만 꿰어 입곤 채비를 마쳤다. 기웃거리며 양말을 갈아 신는 버키의 발을 따라오는 알파인을 쓰다듬곤,) 집 잘 볼 수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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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러 잠금장치를 어찌 푸는지는 보지 않으려 눈을 돌렸다가. 잠금이 복잡해지고 사슬도 조금 짧아진 구속구들은 오히려 전보다 무게가 가벼워져 좋았다.) 으음. (검은 셔츠에 얌전히 두 팔을 꿰어넣고선 단추는 제 손으로 채웠고. 바지에 두 다리 집어넣으면 허리가 약간 낙낙해 골반께에 걸쳐지는 모양이 되어 조금 곤란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댔다가 밑단을 조금 접고서 바짓단의 주름을 잡아 그래도 맵시 있어 보이게 만졌다. 그 새 하늘색 셔츠와 갈색 슬랙스를 갖춰 입은 그를 보고 "잘생겼다," 며 입술을 붙였고. 주방으로 나서 간식 봉투를 바스락대면 그 소리만 들어도 와다닥 달려오는 고양이에게 손으로 짜서 먹이는 간식을 내밀었고.) 알파인, 츄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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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있어야 돼, 알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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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만 먹는다면 망가뜨리거나 전처럼 풀어내는 건 일도 아니겠지만, 그 과정에서 군번을 발견한다면 약간이나마 동요하지 않을까. 그 사이 입술을 스친 온기에 놀라 화끈거리는 입가를 검지로 만지다가,) ……네가 더 예쁘거든, 바보. (방금 그건 뭐길래 저 새침한 고양이가 날뛰듯 기뻐하는 건지. '벅, 언제 샀어?' 괜히 옆구리를 팔꿈치로 찌르며 현관문을 닫았다. 초여름이라지만 저녁은 아직 쌀쌀했고, 제 가죽 재킷을 그의 어깨에 둘러주곤 차고에 비스듬히 세워 둔 할리를 향해 다가서며,) 평일이니까 사람이 많진 않을 거야. (시동을 걸자 묵직한 엔진음과 함께 차체 아래로 강한 진동이 전해졌다. 계기판을 확인하곤 한쪽 발을 스텝에 댄 채,) 조금 높으니까 조심해서 타. (차를 한 대 사야 하나. 묵직한 무게감이 뒤로 실리며 서스펜션이 아래로 가라앉고. 뒤이어 허리를 감싸안는 손길이 닿자, 망설임 없이 클러치를 당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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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걸 고양이들이 그렇게 좋아한대. (손으로 조심조심 짜려 했는데도 제 힘을 버티지 못한 포장지에서 주욱 흘러나온 간식을 고양이는 똑똑하게도 꼼꼼하게 핥아먹었다. 항상 그 혀가 살에 닿을 때마다 한참을 핥아도 축축하지 않은 게 신기했고.) 캣그라스도 사고 싶어. (호텔에서도 가장 먼저 가지고 싶은 것을 화분으로 꼽았던 건 무언가를 기르고 보살피는 감각을 깨우고 싶어서였는데. 어쩌다 보니 화분은 마르기 전에 겨우 물을 주는 중인 반면 더 어려운 고양이 님을 데리고 오게 되었지만. 그의 뒤에 조심스레 올라타면 오토바이가 저희들 무게를 견디지 못할까 싶어 괜한 걱정도 했고. 그의 옆구리 아래로 팔을 집어넣어 앞으로 감싸안고 뺨을 톡, 등에 기대었다. 눈 깜짝할 새에 여름의 짭짜름하다 싶은 바람이 뺨을 스치며 머리칼을 헝클어뜨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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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거 같네, 개박하라고 하나? 고양이들이 유독 좋아한다는 거. (고양이는 혓바닥이 까끌까끌해서, 아무리 상처를 핥아도 낫기는커녕 도로 흠집을 낼 뿐이라고 하던가. 그와 저 역시도 처음엔 서로 상처만 줬던 것 같은데. 씁쓸하게 웃다가 등에 온기가 닿으면 짧은 머리칼이 바람에 나부끼는 동안 놀란 듯 눈을 크게 뜨고,) ……현대에 와서. (딱 한 번 롱아일랜드에 갔던 적이 있어. 혹시라도 네가 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물론, 가능한 한 멀리 도망가려 했던 그가 뉴욕 한복판으로 돌아올 리 없었기에 무의미한 허탕이었지만. 해안선으로 이어지는 벨트 파크웨이에 접어들자, 고가 도로와 교량이 잇따라 드러났다. 21세기에서 억눌러 온 갑갑함을 터뜨릴 때 으레 그랬듯, 아찔하리만치 거대한 교각을 지나 속력을 높이다가,) 루나 파크는 그 사이 한 번 전소되었다가 다시 지어졌대. 싸이클론은 그대로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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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퍼 솔져씩이나 되어서 오토바이에서 떨어지는 것도 빠르게 달리는 것도 하나도 무서울 것 없지만 그의 허리에 팔 휘감아 힘 주는 것은 모두 그런 것 명분 삼은 결과였고. 옛날 버키 반즈가 그러했듯. 모든 일에 이유를 붙이며 스티브 로저스에게 문득문득 닿는 것으로 사심을 채우던.) 너 토했잖아. 또 탈 거야? (스미스소니언을 방문하고 그의 집을 건너편 건물에 숨어 관찰하는 일을 끝으로 미국에서의 할 일을 청산했다고 여겼다. 루마니아에 건너가기까지의 여정은 사실 머릿속에서 흐려졌고. 기억이 뒤에서부터 사라지는 것을 체감했을 땐 덜컥 두려워지기도 했다. 이러다 스티브를 만나고, 사랑을 고백 받고, 침대에서 온기를 나눈 것까지 잊어버릴까봐.) ...... 야경이 예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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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낙 여자애들한테 뻔뻔하게 에스코트하며 잘 웃던 녀석이니까, 자신을 애인들하고 같은 취급 하나 보지. 그땐 그렇게 생각했고, 보호받는 처지가 자존심 상해 밀어내곤 했다. 결단코 싫지 않았다. 그저 그에게 먼저 팔짱을 끼우고, 허리에 팔을 두르고, 그가 가고 싶은 곳을 향해 이끌어주는 젠체한 남성이 자신이길 바랐을 뿐이고……. 지금처럼.) 이번엔 네가 토할 차례라고, 버키. 턱받침도 준비했어. (한 손을 핸들에 올린 채 손수건을 꺼내 약 올리는 건 덤이고. 공용 주차장으로부터 조금 떨어진 보드워크에 오토바이를 세우곤 먼저 뛰어내려 그를 향해 두 팔을 벌렸다. 얼른 안기라는 듯. 해가 빠르게 저물어가는 낡은 공원 근처에는 몇몇 이들만 한적하게 해변가를 거닐고 있었고.) 벅. 괜찮아. (그의 눈에 맺힌 불안을 그새 읽어낸 듯 부드럽게 입가를 끌어올리고,) 몇 번이고 다시 시작하면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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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근한 미소로 끌려올라간 입꼬리를 살피면 무슨 생각인지 훤히 읽혀 귀여웠다. 늘 이렇게 함께 나올 때엔 앞장 서는 것은 제 몫이었는데, 이젠 본인이 에스코트 역할이 되었다 이거지.) 놀리지 마아. (괜히 말꼬리 줄줄 늘이며 칭얼대는 것은 그가 이끄는 '귀여운 연인' 역할에 맞춰 주기 위함만은 아니었고. 요즈음 자꾸 어리광이 느는 것 같아 그렇잖아도 고민이었다. 오토바이에서 내려 두어 걸음 앞선 그를 멀뚱히 바라보다 저도 내려 뛸 듯이 다가가 그의 품에 폴싹 안겨들었고.) ...... 하지만. 리셋하고 싶지 않아. (기계가 될 거라면 입력된 것만큼은 잊지 않고 저장해두기라도 해야지 이 애매한 하자는 뭐란 말인가. 이렇게 쉽게 잊으면 안 되는 건데.) ...... 노을이 보라색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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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을 올려 안으로 둥글게 말려 들어간,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입꼬리를 어루만지며 가볍게 입을 맞추고,) 사랑스러워. (그가 물러진 것 못지않게 저 역시도 최근 웃음이 많아져서 고민이었다. 예전엔 몇 시간이고 며칠이고 홀로 빈 아파트에 틀어박혀 레코드를 듣거나, 운동으로 스트레스를 풀거나, 새벽에 텅 빈 거리를 유령처럼 방황하곤 했는데. 감개무량한 감상을 뒤로 한 채 그를 바닥에 내려주곤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벚꽃잎 사이로 파르스름한 빗금이 쏟아지고, 적자색으로 물든 길 위로 어스름이 내리고. 원더휠이 멀리서 보이는 방향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폐장 시간이라 해도 별 상관은 없었다. 같은 기억을 공유하는 상대가 곁에 있는 게 중요하지.) ……어떤 걸 가장 오래 기억하고 싶은데? (팔짱을 끼고 몸을 바짝 붙인 채로,) 그림으로 그리면 오래 남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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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장 시간이 가까워지는지 인파는 점점 줄어드는 중이었지만 간혹 어스름한 하늘의 분위기를 즐기고자 남아있는 연인들도 보였고. 저희들도 그 중 하나임을 자각하면 묘한 설렘과 동시에 여기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괴리감 역시 올라왔다.) ...... 음. ("잠깐만," 그렇게 말하며 하늘을 등지게끔 그를 세워 두었다. 꼭 영화배우를 단장해주는 스타일리스트처럼 머리칼 한 올 한 올 정리해주다가 고민이 되는지 입술을 앙다물었고. 그러다 자연스럽게 머리를 도로 흐트려 주고는 눈가에서만 가닥들을 치워냈다. "웃어봐," 그렇게 말하고는 뒤로 두어 걸음 물러났다. 예쁜 하늘을 배경으로 어색한 듯 웃고 있는 그를 한참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꼭 머릿속에 사진으로 남기기라도 하겠다는 듯......) 응, 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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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로 아무렇게나 넘긴 데다 이륜차를 타고 온 덕분에 부스스해진 머리칼을 정돈하는 손길에 얌전히 얼굴을 내맡겼다. 몇 발짝 뒤로 물러서길래 사진이라도 찍으려는 건가, 생각했는데. 자줏빛 수채화 물감이 번진 듯한 하늘을 두고 제 모습을 바라보기만 해서. 꼭 조각상이라도 된 기분에 미간을 좁히곤 그에게 다가섰다. 둥근 어깨에 팔을 감아 단말기를 멀리 뻗어 띄운 채,) 배웠어, 이렇게 하라고. (말릴 틈도 없이 찰칵, 찰칵. 연달아 셔터음이 터져 나왔고. 첫 셀프 카메라이니 초점이 흔들리고 엉망일 테지만, 함께했다는 증거는 확실히 남을 테지. 폐장 한 시간 전에 입장권을 사는 이들은 아마 저들밖에 없는 듯싶었다. 직원이 거슬러 주는 거스름돈과 표를 받아쥐곤,) 하나만 탈 수 있겠는데. (원더힐과 싸이클론 사이에서 신중히 고민하다가, 결국 거대한 관람차를 향해 그를 휙휙 잡아당겨 신명 나게 앞장섰다.) 이거 타자, 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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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도 키가 커졌으니까, 분명 하늘이 더 가깝게 보일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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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아진 미간을 꾹꾹 눌러주려 손 빧다가 어깨 잡혀 뭐하냐고 물을 새도 없이 사진을 찰칵찰칵 찍으면 어째 화면에 비친 제 모습은 눈을 도옹그랗게 뜨고 당황스러워하는 꼴이라. 스티브가 귀여워하는 세모 입이라는 게 제 눈엔 그저 바보 같아 보이기만 해서......) 이게 뭐야아. (초점이 나간 사진 속 제 모습이 정말 뭐 잘못 먹은 고양이 같길래 투덜대다 직원에게 다가가 입장권을 살 때엔 그의 등 뒤로 몸을 숨겼다. 그래 보았자 가려질 덩치는 아니지만. 무엇을 탈지의 선택권은 그에게 맡기고서 폐장 직전에도 불은 환히 켜져 있는 놀이기구들을 바라보다 과한 번쩍임에는 눈을 질끈 감았다. 이젠 형광등 빛에는 꽤 익숙해졌다지만 여전히 눈을 찔러오는 번득임에는 불안을 이기지 못하고 그의 손을 꽉 쥐었고. 빙글빙글 돌아가는 관람차로 끌어당겨져 신이 나 보이는 그의 입꼬리에 시선을 걸어 두면 금세 기분이 좋아졌다. 발치에 멈춰선 칸에 몸을 끼워넣으면 생각보다 좁아 둘이 붙어 앉아야 해서.) ...... 너무 커졌다, 우리.
rog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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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즈니랜드에 비하면 한적했고, 초라할 만치 작았지만. 그럼에도 이곳은 둘만의 추억이 깃든 장소였다. 한 세기 전의 독립기념일, 네이선 핫도그를 잔뜩 먹다가 손을 뻗어 제 입가에 묻은 소스를 닦아주던 버키 반즈와 싸이클론을 타고 길바닥에 주저앉던 멍청한 꼬맹이. 닷인지 뭔지에게 곰인형을 준답시고 사격에 열을 올리느라 앉은 자리에서 차비를 전부 날려버린 기억. 풍선 터뜨리기 내기에서 누구보다도 빠르고 정확하게, 모든 풍선을 남김없이 쥐어 터뜨리던 추억이라든지……. 관람차가 천천히 고도를 높이자, 귓가를 맴돌던 소란스러운 웃음소리와 경쾌한 음악이 점차 아득해졌다. 한낮의 열기를 뒤로한 지상에는 폐장을 알리는 따뜻한 주황빛 가로등만이 길을 따라 융단처럼 깔려 있었고, 화려한 오르골처럼 빛나던 회전목마는 텅 빈 채로 느릿느릿 공회전하며 마지막 원을 그리고 있었다.) 벅. 봐봐. 괜찮아. (꽉 찬 실내에 몸을 우그린 채 맞닿아 있던 그의 옷소매를 가볍게 잡아당기곤, 우리가 빛보다 위에 있어. 아무도 널 내려다보지 않아. 관람차가 정점에 다다른 순간, 폐장을 알리는 폭죽이 작게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 순간 충동적으로 고개를 틀어 입술을 겹치곤,) ……예쁘네.
bucky
bucky
(아래를 내려다보면 방금 전 걸어가며 본 풍경이 아득히 멀어져 있었고 보랏빛으로 물들어 그의 얼굴을 예쁘게 감싸던 노을은 사그라든 채 온 하늘이 깜깜해져 있었다. 21세기에는 별이 보이지 않는다더니 보이는 빛이 모두 인공적이었지만 그 역시 나쁘지 않다고 느껴지는 건 그 새색깔 빛을 모두 품어 반짝이는 그의 낯이 어여뻐서일까. 높은 곳을 무서워한다며 루마니아의 호텔에서 그에게 투정 부렸던 것이 생각나기도 했지만. 추락의 가능성 - 그와 저 모두의 - 을 염두에 두지 않고 그와 몸을 딱 붙이고서 아래를 감상하니 붕 떠오른 감각이 나쁘지만은 않았다.) ...... 사랑해. (폭죽이 터지는 순간 입술이 맞닿았다. 아마 이상적인 상황은 아니었을 테다. 높은 곳에서 추락한 경험이 적지 않은 데다 참전 용사인 두 사내가 관람차에서 폭죽을 구경하는 것은 어쩌면 멍청한 생각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말캉하고 폭신한 입술의 감촉으로 더없이 행복한, 여느 연인의 데이트와 다르지 않은 지금이. 그를 더없이 사랑함을 자각하게 되어서. 곧이어 하강하기 시작한 관람차는 서서히 싸이클론도 롤러 코스터도 가깝고 거대해지게끔 만들었고.) ...... 좋았어.
rog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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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은 캐빈 안에서는 고요하게 질척거리는 소리만 여운을 남기며 울렸다. 산소가 부족해 좁고 후텁지근한 공간에 빈틈없이 밀착한 두 사람이란. 꼭 서로 감추고 있을 두려움과 놀라움을 공유하려는 것처럼. 따뜻한 황금빛 불빛과 유리창 너머로 번지는 공원의 소음은 흡사 깊은 물 속에서 듣는 것처럼 웅얼거리며 몽환적으로 들려왔다. 이내 덜컹거리는 소리와 함께 관람차의 문이 열리고, 발끝이 아스팔트 위로 내려앉자 초여름의 서늘한 밤공기가 달아오른 뺨을 부드럽게 스쳤다. 화려하게 반짝이는 입구를 뒤로 하고 주차장을 향해 그의 손을 붙잡고 당기며,) 이번엔 토하지 않고 잘 버텼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한결 옅어진 인파를 헤치자 정리 도중인 듯한 가판대가 눈에 들어왔고,) 남은 팝콘 전부 다 주세요. 저희가 가져갈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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