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2. 20. 22:42
CA
개 이름 같은 걸로 자기 소개하면서 그렇게 부르라고 한 건 너였거든.
barnes
설마. 나 기억 못한다고 거짓말하면 안 돼, 로저스. 너도 개 이름 같다고 생각하긴 하나봐.
CA
'버키라고 불러.' 가 동네 불량배들을 패고 나서 던진 네 첫 대사였다고. 난 네가 한 말을 그대로 인용한 것 뿐이야. 개라고 생각 안 했어. 정말로. 귀엽다고 생각하긴 했지.
barnes
다리에서 네가 부르는 걸 듣자마자 개 부르는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불량배들을 팬 후였는데 귀여웠다고?
CA
그때 난 엄청 비딱한 놈이었거든. 꼭 칭찬해 주기를 바라는 것 같아서 묘하게 짜증 났고. 그래서 뭐라고 했더라, '저리 가'라고 했던가…….
barnes
비딱했다고, 네가...... 그래서. 반즈는 갔나?
CA
안 갔어. 다친 꼴을 보더니 자기 집으로 질질 끌고 가더라고. 질긴 자식 같으니. 고작 몇 개월 일찍 태어난 주제에 형 노릇이나 하려 들고. 유통기한도 얼마 안 남은 친구를 매번 구해주는 게…….
CA
좋았지. 그래. 좋았던 것 같아. 생각보다 멍청하지?
barnes
누가. 너? 아니면 나, ...... 반즈? 같아졌네, 너도. 결국 망가진 것 이어붙이려 질기게 따라붙게 되었으니.
CA
글쎄, 버키는 내 뒤치다꺼리가 지겨웠을 것도 같은데. 난 멍청하지만 은혜도 모르는 파렴치한은 아니거든. 버키 반즈가 없었다면 진작 죽었겠지.
barnes
그러니까, 버키 반즈를 위한 무던한 노력은 전부 그 은혜를 되갚기 위함이라고. 무얼 얻고자 하는지 알아. 반즈라면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걸 알아서, 결국 내가 그의 입을 빌려 반박하게끔 할 생각이잖아. 지겹지 않았다고. 그리고 은혜를 갚을 필요도 없다고. 맞지?
CA
은혜라기보단, 글쎄. 넌 어릴 때부터 누군가의 보호자였어. 네 가족과 나를 분할 정도로 완벽하게 지켜냈지. 반면 난 너보다 강해졌을 때조차 널 지켜내지 못했고. 실패를 만회하고 싶다고 생각해 보는 건 어때.
CA
넌 머리가 좋아. 준비도 철저했고. 저격수로서 완벽한 조건을 갖췄달까. 하지만 꼭 지나치게 앞서서 실수하기도 했지. 내가 원하는 건 약간, 아주 약간 달라.
barnes
설령 네 몸이 그보다 커지고 힘이 앞섰다 해도...... 도리어 보호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진 않았을 것 같은데. 그러니 애초에 실패는 없었던 거야. 주어진 임무가 없었으니. ...... 뭐가 다른데?
CA
애석하게도 난 누구처럼 책임이니 의무에 따라 움직이지 않거든. 그 어떤 말을 해도 널 포기한다는 결론은 안 나올 테니 네가 포기해야 돼. 그전에, 나도 묻고 싶은 거 많거든. 벅. 버키라고 부르는 게 싫어?
barnes
너 고집불통인 건 내가 반즈가 아니더라도 알 수 있거든. ...... 차라리 그게 낫겠네. 오기로 달려드는 거라 생각하면 이해할 수 있어.
barnes
싫은 게 아니지. 반즈의 이름이잖아.
CA
좋아. 그럼 내가 널 뭐라고 불러야 네가 덜 불편할지 얘기해 줘.
CA
내가 고집불통인 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이상한 거야. 가족을 구하는 데에 이유나 조건 따위를 왜 따져야 해? 목숨 정도는 내던지고 봐야 하는 거 아니야?
barnes
...... 목숨 그렇게 쉽게 내던지지 마. 게다가 이 몸은 너와 혈육도 아닌데.
barnes
에셋.
barnes
그렇게 부르라고 하면 화낼 거잖아.
CA
그래, 네가 죽는다고 해서 내가 전사통지서를 받을 수도 없었지. 그래서 기어코 전장까지 쫓아갔고.
CA
못 들은 걸로 칠 거야. 다른 거.
barnes
다른 건 몰라. 불린 이름 중에선 에셋이 가장...... 나았어.
barnes
뭐만 하면 죽겠다는 심정으로 임하는 그 버릇은 어디서 배워 온 건데?
CA
죽는 게 별거 아니라고 생각하면 뭐든 쉬워져. 어릴 땐 그게 사실이었고.
CA
……. 별 수 없지. 제임스 뷰캐넌 반즈라고 하자. 어차피 죽은 사람 이름이잖아.
barnes
반즈가 알았으면 퍽이나 좋아했겠네. 손 부르트도록 일해 가져다 준 약을 그딴 생각 하며 삼키고 있는 걸.
barnes
길잖아.
CA
그런 건 박물관에 안 적혀있는데. 그치, 벅?
barnes
...... 몰라. 다른 데서 읽었나보지.
barnes
인터뷰. 그런 것 했잖아, 아니야?
CA
그렇구나. 하지만 난 인터뷰에서도 사적인 얘기는 거의 안 했는데. 하기 싫어서.
CA
다른 사람이 너에 대해 멋대로 지껄이는 게 꼴도 보기 싫어서. 벅, 짧고 좋네. 이걸로 가자. 너도 좋다고, 벅?
barnes
마음대로 해. 어차피 그렇게 할 거잖아.
barnes
너 이렇게 성격 나쁜 것 반즈도 알아?
CA
글쎄, 목숨을 버리기 전에 알았더라면 더 좋았을 텐데.
CA
벅.
barnes
왜.
CA
……부르니까 좋네. 눈물 날 정도로.
CA
그래서, 요샌 뭘 하고 있는데? 하이드라에 복귀하진 않은 것 같고.
barnes
울지 마. 난 그게 무슨 감정인지 몰라서 위로해줄 수 없거든.
barnes
...... 너 피해서 도망 다니고 있었지.
barnes
아무것도 하지 않아. ...... 음식을 먹고. 그 맛을 다시 익히고. 시덥잖은 일들.
CA
기왕이면 평생 모르고 살도록 해. 네 온몸이 만신창이라는 것도. 네가 그 모든 걸 감당하면서 괴로워하는걸, ……. 굳이 보고 싶진 않네.
CA
그런 소리 하면 평생 쫓아다닐 수밖에 없잖아. 정말 안 잡혀줄 거야?
barnes
내가 인간으로 살길 바라는 것 아니었나. 제아무리 짐승이라도 제 몸 망가진 것 정도는 알아, 로저스.
barnes
언젠간 지치겠지, 너도.
barnes
말했잖아. 싫은 게 아니라고. 개 치고는 주제 파악을 잘하는 거라 생각해.
CA
'네가 날 기억해 주길 바란다.' 와 '네가 인간답게 살길 바란다.' 사이엔 상당한 갭이 있어. 벅. 전자는 이기적이고 후자는 이타적이지. 난 명백히 전자고.
CA
내가 뭘 원하냐고 물어봤지? 난 지지부진한 걸 별로 안 좋아해. 필요하다면 영원히 쫓아다닐 수도 있지만, 그건 둘 다에게 손해잖아.
barnes
반즈는 인간이었잖아. 나는 아니고. 결국 네 곁에 있는 게 짐승이든 물건이든 아무런 상관 없는 거라면 이름이 에셋이든 개새끼든 다 괜찮은 것 아닌가? 지지부진한 게 싫다면서 단 맛과 쓴 맛도 구분 못하는 놈 데리고 뭘 하겠다는 거야......
barnes
잡히기만 하면 되는 거야? 그거면 돼?
CA
반대지, 벅. 짐승이든 물건이든 인격이 말살된 병사든 살인 도구든 병기든, 한때는 내 친구였던 제임스 뷰캐넌 반즈라는 사실이 중요한 거야.
CA
감정을 배우고 싶다면 내가 도와줄게. 현실에 적응하길 바란다면, 최선을 다해 보호하면서 곁에 있을게. 자유를 원한다면, 그것도 언젠가는 줄게. 네가 원하는 건 뭐든 다 들어줄게. 대신 내 부탁 하나만 들어줘.
barnes
말해봐. 그 부탁이란 게 뭔지.
CA
네가 날 끝냈으면 좋겠어.
barnes
무슨 뜻이야?
CA
네 임무는 날 죽이는 거였잖아. 아니야?
CA
그걸 다해줬으면 해.
barnes
로저스.
barnes
가. 잠시라도 그 옆자리에 혹했던 내가 머저리지.
CA
진짜 싫어하네.
CA
왜, 네가 버키가 아니라면 싫어할 이유도 없잖아. 음?
barnes
그래. 싫어.
barnes
그리고 이 감정은 분노인 것 같거든.
barnes
그치? 네가 보기엔 어때.
CA
좀 더 적극적이어야 하지 않나? 멱살도 좀 잡고. (왼쪽 손목을 낚아채 제 가슴팍 위에 짓누르듯 얹곤,) 이렇게.
CA
왜 싫은데?
barnes
(왼손은 때로 제 통제를 벗어나 해치려는 목적 하나로 주변으로 뻗어나가곤 했다. 그렇게 깬 유리잔이 몇 개며 비틀려 망가진 문 손잡이도 꽤...... 때문에 어서 그로부터 떼어내려 손목을 마구 튼다.) 놔.
barnes
싫으니까. 당연한 것 아니야? (열 띤 음성에 물기 섞이려는 것을 여러 번 목울대 울렁여 누른다. 나한테 왜 이래. 이젠 억울함에 낯이 일그러지고.)
CA
안 놔. (손가락 끝이 관절을 파고들자, 미세한 서보 모터의 소음이 비인간적인 냉기와 뒤섞여 진동을 타고 흘렀다. 움켜쥔 손에 서서히 악력을 더하자 손등 힘줄이 불거졌다. 금속 판들이 마찰하며 그가 내지르지 못한 비명처럼 공허하게 울렸다.)
CA
……네가 멋대로 구했으면 네가 끝내란 말이야. 내팽개치고 도망치지 말고. (이를 가볍게 갈며 시선을 맞췄다. 숨을 고르느라 음성이 낮아진다.) 네 손에 죽은 다른 사람들이 부러울 지경이야, 알아? 그런 건 공평하지 않잖아.
barnes
...... 널 닮은 사람을 수십은 죽였어. (처음엔 그들을 모두 '스티브'라고 불렀다. 그럼 목을 꺾어 죽여야 했기에 이름부터 잊었고. 금발과 벽안에 반응하지 않을 때까지. 그가 지금 쥔 왼손으로.) 아, 알겠지. 읽었잖아. 하이드라가 남긴 기록.
barnes
그래. 그런데 너는 알아봤어. (눈 앞의 막무가내인 사내의 집요한 시선을 고개 돌려 피한다.) 그래서 죽일 수 없었어. 만족해? 재밌냐고.
CA
좋겠다. (한숨을 내쉬며 입술을 일그러뜨렸다. 죽어 마땅한 것들이 죽었다는 사실에 새삼 놀랄 정신머리도 아니고. 거의 으스러뜨릴 기세로 틀어쥐던 힘은 풀지 않은 채, 떨어뜨린 시선을 뒤쫓아 고개를 약간 숙였다.) 벅.
CA
나랑 같이 가. 감정을 알고 싶다면, 나랑 붙어있는 편이 너한테도 나을걸.
barnes
...... (권유가 아님은 알 수 있다. 혹여나 그를 해칠까 두려워 까딱도 하지 않는 왼손을 붙든 손아귀만 보아도. 몸에 힘이 풀린다. 결국 길들이기 쉬운 개새끼임이 증명되지 않았는가. 지친 눈이 그를 향한다.)
barnes
나한테도 조건이 있어.
CA
(말해보라는 듯 짧게 눈짓하곤,) 들어줄 수 있으면.
barnes
내가 내 몸에 무슨 짓을 하든 개입하지 마. 그리고 다시는 죽겠다는 말 하지도 말고.
barnes
그러면 따라갈게.
CA
……. 끝난 다음의 사후 처리는 개입이 아니야, 그렇지?
CA
죽지 않을 정도로만.
barnes
그래. 날 살려두는 건 네 마음이야.
barnes
언제고 지치면 그냥 내버려둬도 돼. 난 원망이란 감정을 모르니까.
CA
잘 됐다. 내가 네 몫까지 날 원망하면 되니까. 네가 죽으면 모든 게 무효라는 건, 굳이 말하지 않아도 잘 알겠고…….
barnes
...... 그래. 이제 놔. 어깨 아파.
CA
(그제야 축 늘어진 팔을 놓곤 부드럽게 끌어안았다.) 상관한테 명령해, 병장님?
barnes
병장이 아니라니까...... (투덜대는 음성에는 힘 하나 실리지 않은 채. 기억 속엔 더 작았던 품에 아주 잠시 기대어 본다.)
CA
하긴, 작전 중 실종이면 특진해도 이상할 것 없는데. 펜타곤이 야박하기도 하지. (차분히 쓸어만지던 손이 등 위에 머물렀다. 부서지기라도 할까 봐 힘을 주지도 못하면서도, 결코 놓치고 싶지 않다는 듯 옷자락을 꾹 말아 쥐는 손가락 끝이 희미하게 떨렸다.) 나라도 중위라고 불러줘야 하나…….
barnes
됐어. 내 것 아닌 이름을 몇 개나 더 붙여 주려고...... (흐리멍덩해졌던 정신이 돌아오면 몸을 뒤로 물리려 등허리 꼿꼿하게 세운다. 버릇처럼 입술 짓씹고.) 어디로 가는데?
CA
집이 다 박살 나서 하나 사긴 해야 돼. 그전까진 어벤저스 타워에서 눈 붙이고 있었거든. (입술 거스러미 틈으로 피가 번지는 것을 발견하자 검지를 세워 누르곤,) 벅.
barnes
...... 타워는 싫어. (왜 박살 났느냐고 물으려다 아, 하고 입 다문다. 거친 입술에 손 와 닿으면 눈 들어 시선 맞추고.) 응?
CA
알았어. 거기로 안 데려가. (강아지도 아니고. 손끝을 떼곤 청회색 눈동자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그동안 어디에서 주로 지냈는데. 신세 좀 지게.
barnes
...... (왜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들만 던지는가. 어제는 폐공장 건물에서 잤고, 그 전엔 빈집의 창고였다. 눈동자 굴리고.) 기억 안 나.
CA
네가 대답하기 곤란한 짓만 골라 해서 그렇겠지. (알만하다는 듯 한숨을 내쉬곤 단말기를 열었다.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호텔을 확인하곤 손을 잡아끌었다. 현금도 충분하니 며칠 정도는 괜찮겠지.) 도망가기만 해 봐.
barnes
묶어두기라도 하려고? (잡아끄는 대로 딸려 가면서도 지금 당장 도망가야 한다는 본능이 앞서는데. 아무것도 약속할 수 없다. 그럼에도 그의 눈치를 살피게 되고, 입꼬리 움직임 하나하나에 주의 기울이게 되는 건.) 왼손 말고 오른손 잡아.
CA
하는 거 봐서. (오른손을 맞잡자 덜 다듬어진 손톱과 겹겹이 쌓인 생채기가 미지근한 손바닥에 맞닿았다. 미미한 체온이 묻어 나오는 손을 깍지 껴 쥐곤,) ……묶어둔다고 해서 얌전히 있을 것도 아니잖아. 네가 따라오기로 선택한 거야.
barnes
다른 선택지가 주어지지 않았잖아. (오늘만. 하루만 그의 곁에 있어볼까. 속에서 아우성 치는 반즈를 만족시키기 위함이라고 생각하자.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아무렇게나 끌려 가다가.) 얌전히 있을게.
CA
(처마 끝에 맺혀 있던 굵은 물방울이 툭, 소리를 내며 보도블록 위로 떨어졌다. 그 위로 발을 내딛곤 모퉁이를 돌았다. 주위 풍경을 의식하면서 걷는 게 몇 년 만이더라.) 그럼, 옷부터 사자. (여기저기 해어진 후드티를 손끝으로 꾹 누르곤,) 너무 낡은 옷은 오히려 눈에 띄는 법이라고, 벅.
barnes
옷은, ...... (어딘가 가게에 걸어들어가 옷을 입어보고, 사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다. 큰 눈에 두려움부터 차오르는 것 보이기 싫어 고개 옆으로 돌리고. 임무 나갈 때를 제외하고는 제대로 사람의 옷 걸친 일도 없는 데다. 낡은 옷 밑단을 죽죽 잡아당기면서 문장을 그대로 띄워 둔다.)
CA
(쓰고 있던 챙 모자를 벗어 그의 머리 위에 푹 씌워주곤,) 걱정 마. 내가 알아서 할게. (스파 매장이면 충분하겠지. 별로 익숙하진 않지만 나타샤로부터 들었던 조언을 되새기며 유리문을 열어젖혔다. 정돈된 행거를 따라 손끝을 대며 손에 닿는 소재를 확인하고, 소매 끝의 디테일이나 단추 모양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비교적 무난한 스웨트 셔츠를 꺼내 주춤거리는 그의 몸에 대 보곤,) 이 정도면 괜찮나?
barnes
...... (뭘 묻는 거지. 그가 들어올린 옷은 평범했고, 의류의 기능을 완벽히 할 것으로 보였다. 색과 모양에 대한 선호도는 허락된 적 없었고 반즈의 취향은 지워진 지 오래다. 의아한 얼굴로 고개 끄덕. 여전히 손은 깍지 껴 잡힌 채. 사람의 온기에 이렇게 오래 노출된 적이 없었기에 맞닿은 손바닥부터 열이 오르는 것만 같다. 눈 돌리면 푸른 빛의 스웨터가 눈에 들어온다. 따뜻해 보이네.)
CA
(혹시라도 빠져나갈세라 장갑을 벗은 제 손과 그의 하나뿐인 오른쪽 손끝과 손바닥은 단단히 얽힌 채였다. 청회색 눈동자가 붙박은 방향을 뒤쫓듯 고개가 절로 돌아갔다.) 저거? (너무 눈에 띄지 않나? 내키지 않는 듯 집어 들어 상체에 대었다. 걱정은 기우였구나, 얼굴이 되니까 뭐든 그럭저럭 어울리네. 다소 핏기 없어 보이는 건 아쉬웠지만. 태그조차 확인하지 않고 계산대에 올려두었다.) 생각보다 잘 어울리네. 예전에 네가 입던 스타일하곤 거리가 멀지만.
barnes
아니...... (옷을 대어 보고 얼굴부터 몸을 훑어보는 시선에 조금 움츠러든다. 별로 마음에 안 들어하는 얼굴 아니었나. 사지 않아도 되는데. 만류하는 제 음성이 귀에 들어가기는 하는 건지. 원래 이렇게 제멋대로였나? 이대로라면 제 시선 닿는 물건이면 다 집어들 것 같아 눈 내리깔고. 어차피 하루다. 다정함과 통제 그 어드메를 오가는 그의 행동에 따르는 건, 오직 하루.) ...... 이제 가면 안 돼? 너무 오래 있었어.
CA
(치수는 자신과 비슷하거나 조금 더 작게. 새삼 뇌리에 새기며 포장된 종이 가방을 챙겨 들었다. 점원의 호기심 어린 시선이 제 얼굴을 건너 그에게 닿기 직전, 쇼핑백을 방패처럼 높게 들어 올려 그와 자신의 안면을 가린 채 매장을 나왔다.) 재촉 안 해도 돼. 사람들 싫어하는 건 나도 마찬가지라서. (건널목 앞에서 잠시 멈춰선 채 긴장한 그를 곁눈질하다가,) 가더라도 가지고 가. 네 거니까.
barnes
예전엔 안 그랬잖아. (멈출 새도 없이 불쑥 튀어나오는 말. 반즈의 기억 속 스티브 로저스는 사람들 사이 어색하게 굴긴 했지만..... 사람을 위하고, 구하고 싶어했다. 아닌가?) ...... 가? (속내를 들켰다는 생각에 놀람도 잠시. 옷가게 안의 일들을 되짚는다. 그의 심기를 거스를 행동을 했던가? 붙들어 두겠다던 굳은 생각을 지워버릴 만큼. 잘된 일인데. 입술을 잘근잘근 씹어대며.)
CA
떠날 생각 만반인 것도 모를 만큼 눈치 없진 않거든. (안쓰러울 만큼 자신을 살피는 그에게서 시선을 떼는 대신, 손을 조금 더 세게 고쳐 쥐었다.) 구하고 싶다는 마음이 변한 건 아니야. 하지만 시선이 부담스러운 건. (생각해 보니, 그 진심을 누군가에게 털어놓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과거에도, 현재에도. 단 한 사람을 제외하곤.) 글쎄. 네 앞에선 투정 부리고 싶었나 봐. (이내 외곽의 작은 관광호텔에 발을 들여놓았다. 시선이 닿지 않아 잠시 숨을 고르기엔 더없이 적당했지만, 오래 머물기엔 서늘한 익명성이 느껴지는 공간이었다.)
barnes
많이 변하진 않았어. 너. (반즈는 어땠던가. 다른 것보다 선연히 남아있는 감정들을 떠올린다. 병약한 그 자신의 몸을 원망하며 타인의 동정 어린 시선들에 질색하던 친우가 자신 앞에서 만큼은 조금이나마 연약한 구석을 드러낼 때. 반즈는 기뻐했다. 친우의 불운에 슬퍼하면서도 특별하단 우쭐함에 젖는 그 자신에 대한 혐오도 적지 않았고. 생각에 잠기면 제 오른손도 그 만큼이나 맞잡은 손에 힘을 실어두었다는 것조차 잊는다. 마치 그가 삶과 자신을 이어둔 유일한 끈인 것마냥 붙들고, 이전처럼...... 조금은 싸늘한 건물 안에 들어서면 그제서야 깨닫고 손에 힘을 푼다.) ...... 미안. 말을 하지. (손 으스러질 정도의 힘이었을 텐데. 하루를 보낼 건물 안으로 들어선다. 방이며 층수며 하는 모든 결정을 그에게 넘겨둘 심산으로 멀뚱.)
CA
(그가 무력했던 자신을 돌보면서, 끝없이 책임을 떠안음으로써 약간의 자부심과 자기 효능감을 채우고, 그것을 친근함으로 정당화하는 과정이 조금쯤 들어있지 않았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제 몸 하나 건사하지 못해 그 보호에 기댄 것은 결국 자신이었으므로, 간혹 그런 기형적인 공생 관계도 우정이란 이름으로 합리화되기 마련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언제나, 한결같이 아무런 대가나 부연 없이 믿어주었고, 끝끝내 죽음까지 따라온 단 한 명의 친구였고.) 아쉽네, 더 오래 잡고 있어도 됐는데. (허전해진 손을 쥐었다가 펴며 카운터에 다가섰다. 표시된 요금보다 조금 더 많은 액수의 지폐를 올려놓자, 의미심장하게 둘을 번갈아 보던 직원은 군말 없이 최상층 키를 꺼냈다.) 가자.
barnes
(가자는 말 한 마디에 그의 뒤를 따른다. 지금의 자신이 이전의 '에셋'과 무엇이 다른가. 땅바닥을 기어 핸들러의 발꿈치 쫓아다니지 않는다는 점인가. 명령에 가까운 말들을 따르다 보면 의식이 점차 흐려져 몇 번이나 눈을 깜빡여야 했다.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어 놓고 벽에 등을 붙인다.) ...... 떠날 생각 하면, 놓아줄 거야? 눈치 챘다며.
CA
억지로 붙잡아두는 건 의미 없어. (맞은편에 기대 고개를 뒤로 젖혔다. 그가 자신을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으니 소기의 목적은 달성한 셈이었다. 느리게 이동하는 동안 잔잔한 음악이 흘러나오자 짧은 허성을 터뜨렸다. 낡았네, 우리만큼이나.) 네가 떠난 다음에 내가 어떻게 돼도 상관없다면. (녹슨 현관에 카드키를 대곤 불도 켜지 않고 들어섰다. 세제 냄새를 강하게 풍기는 침대 모서리에 걸터앉고는 두 손을 깍지 낀 채, 어둠 속에서 느슨히 여닫히는 섬세한 눈을 가만히 응시했다.) 떠나지 말라고 명령하면, 들을 거야?
barnes
(엘리베이터 안을 두 남자의 웃음소리가 채우고, 키가 큰 브루넷은 장난스레 몇 번 스텝을 밟는다. 문이 열리면 아무 일도 없었다는 양 멈춰서지만 입꼬리는 씰룩대던...... 처음 떠오르는 기억이다. 21세기의 엘리베이터는 음악을 틀어주지 않고, 이 몸은 춤 추는 법을 잊었다. 그런데 그는 고르고 골라 엘리베이터에 음악이 흐르는 호텔로 저를 이끌었고. 그가 침대에 걸터앉아 저를 바라보면, 그 푸른 눈빛을 피해 몸을 숨기고픈 충동이 반절. 나머지 반절은 그 시선이 떨어지지 않길 바라는 제임스 반즈의 유령이 차지한다. 느릿한 걸음. 하나, 둘, 셋. 침대에 앉은 그의 발치에, 바닥에 무릎 접어 앉고. 회색 눈동자가 위를 향한다.) ...... 명령해봐.
CA
(고작 반나절 만에 그는 조금씩 되돌아오는 기억의 편린을 더듬고 있는 듯했다. 무심코 리듬에 맞춰 손끝을 미세하게 들었다 내려두던 그를 잘못 본 게 아니라면. 제겐 고작 몇 달 전의 일처럼 생생한, 떠올리려 하면 할수록 부질없이 선명해져 고립감을 자각할 뿐인 좋은 추억들. 누군가와 공유할 일 없이 뇌리에 고여 혹 혼자만의 망상은 아니었을까, 그렇게 생각한 적도 있었는데. 슬개골이 바닥에 쓸려 메마른 소리가 울렸다. 그럼에도 눈길만 떨어뜨린 채 미동조차 없이 내려다보았다.) 명령할 것도 없지. 넌 내 부탁이라면 뭐든 다 들어줬잖아. (손이 까칠한 턱 아래로 스며들듯 파고들었다. 조심스럽게 고개를 젖혀 시선을 제대로 맞추곤, 이내 남은 팔로 어깨를 감쌌다.) 가지 마. (뺨을 쓸어내리며 쇳소리 섞인 목소리를 나직이 떨어뜨렸다.)
CA
너마저 없으면 난 정말로 혼자란 말이야. …….
barnes
...... 나는 반즈가 아니야. (하지만 그를 이해할 것도 같다. "왜 거절하지 못했는지 알 것 같아. 고생했네." 의식의 맨 뒤에 웅크린 반즈의 유령에게 한 마디 건넨다. 로저스는 분노할 적에 차가웠다. 음절이 짤막하게 끊기며 문장이 단조로운 것이 모든 말을 권유보다 명령으로 들리게끔 했다. 그럼에도 지금처럼 나직이 속삭이며 원하는 바를 말할 때면. 눈썹이 미세하게 떨어지고 절망을 내비치는 낯을 만들어내면. 무엇이든 들어줘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질리게 될 거야. 네 "버키"를 그리워하게 되겠지. 화가 날 거야. (손을 올려 뺨을 때린대도 할 말이 없다. 버키 반즈의 죽음에 하이드라 만큼이나 제게 책임이 있었으니. 방금까지만 해도 같잖게 그의 흉내를 냈지 않나.) 하지만......
barnes
나는 말을 잘 들어. 명령했으니 따를게.
CA
(얼굴선과 귀 밑을 훑는 손길은 느리게 지속되었다. 마치 그가 이 자리에 있음을 여실히 실감하려는 듯이. 이내 저 역시도 먼지투성이 바닥에 내려와 두 팔을 목에 감았다. 턱을 어깨에 올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서로에게 기댄 채, 맞닿은 맥박에 귀를 기울이다가 그의 호흡을 듣기 위해 숨을 죽였다.) 벽보단 네가 낫겠지. 네가 없을 땐 벽이나 거울에 대고 혼잣말했어. 웃긴 건 가끔 대답이 들려왔다는 거고. 꽤 생생하게. (맥 빠지게 웃곤,) 넌 모르겠지만, 버키도 꽤 열받게 굴 때가 많았어. 네가 내 옛 친구가 될 수 없다고 해서 새 친구가 되지 말란 법도 없고. 안 그래? (자조를 내뱉고는 오르내리는 등허리를 천천히 다독였다.) 씻고 와도 돼. 누가 들어올 일도 없고. 되도록 아무도 없는 층으로 달라고 했으니까.
barnes
친구라서 그런가 비슷한 짓을 했네. 반즈는 널 자주 찾았어. (제임스 반즈와 에셋의 경계가 아직 흐릿할 때. "스티브," 하고 이름을 뱉어놓고 다음 순간엔 "그게 누구더라," 스스로에게 묻는 일이 잦았다.) 친구는 사람이랑 하는 거야, 로저스. (나도 아는 걸 왜 너는 모르냐는 듯. 지금 이 순간에도 그가 바닥으로 몸을 낮춘 게 못내 신경 쓰였다. 딱딱하지 않은 오른손 하나라도 그의 무릎 아래로 들이밀고. 씻고 오란 권유에 몸 반쯤 일으키며 그의 팔도 함께 잡아끌어 세운다. 깨끗해지는 것. 그래, 몸이라도 닦아내야 곁에 있는 것이 덜 죄스러워진다. 샤워실로 걸음 옮기며.) 바닥은 내 자리야.
CA
네가 대신 대답해 주지 그랬어. 널 구하러 오지도 않는 글러 먹은 친구라고. (듣기만 해도 비참한 이야기에 속이 난도질당하는 기분이었다. 남의 말처럼 쉽게 내뱉는, 해리된 감정과 당시 그가 겪었을 고통 사이의 간극을 가늠하자니 저도 모르게 구역질이 일었다. 다만 그의 말은 귓등으로 흘려들으며 여분의 베개와 얇은 이불 몇 장을 바닥에 떨어뜨리곤 그 위에 드러누웠다.) 70년동안 기약 없이 얼음 속에 파묻혀 있다가 수십 가지 공정을 거쳐서 되살아난 실험체는, 벅. (욕실 문이 닫히고 나서야 얄밉게 한 마디 덧붙였다.) 시체라고 부르는 편이 맞지 않을까?
barnes
(시야 한 켠에 그가 바닥에 자리 잡고 아예 눕기까지 한 것을 보며 이를 까드득. 바닥은 차고 딱딱해 로저스에게 알맞는 자리가 못 된다. 지금은 아프지 않다지만, 앞으로도 그럴 일은 없다지만...... 이죽대는 낯에 답하려 돌아서는 대신 욕실로 들어선다. 닫히는 문 안으로 날아들어오는 말에 휘청. 금속성의 팔이 세면대 표면에 부딪쳐 사나운 소리가 고막을 어지럽혀 놓는다. 깨지지 않은 게 다행이지. 로저스의 시선 닿지 않는 곳에선 엉망으로 입술을 짓씹을 수 있었다. 괜히 콰득콰득 살을 뭉개 기어코 피를 낸다. 옷을 벗어 한 켠에 개어 둔다. 찬물이 나오도록 꼭지를 비틀고 그 물을 몸에 아무렇게나 쏴대면 서늘함에 절로 떨림이 일었다. 갈아입을 옷 챙겨 들어오지 않았단 사실은 뒤늦게 깨닫고.)
CA
(겉으로는 새로 도배해 멀끔해도 연식을 가리기엔 무리였는지, 숨을 들이쉬자 희미한 먼지와 곰팡내가 쿰쿰하게 밀려 들어왔다. 한 팔을 머리에 베고 자세를 고치려던 순간, 세라믹을 두드리는 날카로운 금속음에 곧바로 상체를 일으켜 자세를 바로 했다.) ……. (구겨 던진 도화지처럼 미간을 일그러뜨리며 얇은 벽 너머로 기민하게 귀를 기울였다. 넘어진 것 같진 않은데. 그러나 그나 자신이 펌프질해 쓰는 비누가 상용화되기 전 시대의 사람이라는 점, 더불어 갈아입을 옷은커녕 수건조차 가지고 들어가지 않았다는 사실을 파악하자 손은 이미 욕실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잠금장치가 고장 나 손쉽게 열린 공간을 메운 한기에 한숨을 내쉬곤,) ……. 뒤돌아 봐. (수전을 돌려 제 손등에 샤워 헤드를 기울이다가, 온도가 맞춰지고 나서야 그의 어깨에 갖다 댔다. 이내 차츰 정수리를 적셔가며 남은 손으로 샴푸 통을 짜내 거품을 내곤 머리칼을 구석구석 매만졌다. 그러니까 그때 버키가 분명.) 눈 감고 있어.
barnes
(그냥 열고 들어올 거면 문은 왜 두드린 걸까. 타인에게 알몸 보여주는 것에 대한 수치심이야 하이드라에 의해 벅벅 긁어내졌으나 몸에 새겨진 흉을 시선 아래 낱낱이 드러내는 것은 피하고 싶었던지라. 때문에 욕실로 들어선 로저스에게 뾰족한 눈매를 세운다.) ...... 왜. (왜 한숨을 쉬냐는 뜻이었다. 이번엔 난 잘못한 게 없는데. 돌아서면, 사실 제 등이 어떤 꼴인지 저로서도 잘 알지 못했다. 제대로 살펴본 적이 없으니까. 어떤 흉이 있는지 누가 표식이라도 새겨놓았는지, 기억이 흐릿하니 확실하지 않았다. 몸에 따스한 물이 흩뿌려진다.) 걔들은 날 찬물로 씻겼는데. (하이드라의 핸들러들을 의미했다. 개중엔 나름대로 다정하게 굴던 놈도 있었지만 한 번도 따뜻한 물에 제 몸을 적셔준 적은 없었다. 얌전히 눈을 감고.)
CA
(날개뼈를 따라 길게 가로지르는 자국은 이미 희게 변해 딱딱한 옹이처럼 굳어 있었고, 철판이 덧대진 왼쪽 어깨 주변으로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작은 점상 흉터들이 흩어져 있었다. 근육의 굴곡을 따라 일그러진 살갗은 제때 아물지 못한 채 덧난 흔적들이 겹겹이 쌓여, 마치 누군가 날카로운 펜촉으로 써 내려가다 만 미완의 비문이 그의 등 가득 새겨져 있는 듯했다. 차마 손으로 만질 엄두조차 내지 못한 채 샤워기로 거품을 흘려보내며,) ……. 많이 아팠겠네. (당장에라도 샤워 호스로 제 목을 감아 연명하던 숨을 끝내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느라, 뺨이며 목덜미엔 식은땀과 튄 비눗기가 범벅이 된 채였다. 마른 수건으로 젖은 머리와 얼굴의 물기를 꼼꼼하게 닦아주곤, 벗어둔 옷 위에 올려둔 샤워 가운을 곁눈질했다.) 갈아입을 게 없으니 이거라도 써.
barnes
기억 안 나. (개운함. 언제 마지막으로 느꼈는지 모를 감각이 몸을 둘러싸고 입꼬리가 슬쩍 올라간다. 샤워 가운 들어올려 천천히, 어색하게 소매에다 팔을 꿰어넣고. 속눈썹 팔랑거림 사이 회빛 눈동자가 그의 얼굴에 닿는다. 고개 기우뚱. "내가 슬프게 만든 것 아냐. 난 아무것도 안 했어." 반즈에게 변명처럼 되뇌이다 어떤 관성에 이끌려 오른손을 그의 뺨에 얹는다. 엄지로 눈가를 쓸어주고, 땀을 훔쳐내며.) ...... 대답했어. (반즈에게. 몇 번이고 그는 오지 않는다며.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흘러 반즈가 조용해지고 에셋이 혼자 남았을 때......) 나도 네가 오길 바랐던 것 같아. (말이 위로가 될지 비수가 될지는 감정에 서툰 짐승이 헤아리기 어렵다. 하지만 '보고 싶어했다'는 것 정도 전달하면 기뻐하지 않을까 싶어서. 손가락이 익숙하게 금발 사이를 헤집고, 헝클어뜨리며 쓰다듬는다. 저질러 놓고 나서야 왜 그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나 의문을 가지고.) 자자. 넌 침대에서.
CA
……. (뭘 말이야. 무심코 반문하려고 입을 열다가, 습기 너머로 서툰 손길이 물을 닦아내는 것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떴다. 결국 달래는 건 언제나 네 몫이지. 몸이 커졌다고 해서 지켜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니, 얼마나 큰 착각이었는지.) ……죽었다고 생각했어. 곧바로 따라가고 싶어서 발키리를 추락시켰는데, 행선지가 틀렸던 거지. ('거 봐, 네가 너무 잘나서 우린 끝까지 함께하지 못할 거라고 했잖아. 버키.' 그렇게 투덜거리던 순간을 되새기며 푹 젖은 수건으로 제 목덜미와 얼굴을 마저 닦아냈다.) 침대는 너무 부드러워서 별로야. (역시 그의 의견은 가볍게 무시한 채, 바닥에 깔린 이불 위에 아무렇게나 다리를 뻗은 채 빈 자리를 손끝으로 두드렸다. 안 올 거냐고 재차 되묻듯.) 쿠션 몇 개만 더 두면 완벽할 텐데.
barnes
....... 알아. 들었어. (캡틴 아메리카의 죽음을 보도한 신문 쪼가리를 제게 구겨 던지며 조소하던 자들을 떠올린다. 로저스의 죽음을 전해 들은 반즈는 얼마 지나지 않아 희망을 놓아버렸고. 이토록 엇갈리기도 쉽지 않았을 텐데. 결국 캡틴 아메리카를 마주하고, 옆자리에 붙들린 것은 제임스 반즈가 아닌 제가 되었다. 가짜, 모조품.) 별로 안 부드러워 보이는데. (이 호텔의 모든 것이 그렇듯 침대 역시 조금 연식이 있는 듯 보였다. 이전 그가 걸터앉을 때에도 스프링 소리가 들렸고. 바닥에 널부러진 이불 위로 엉금엉금 기어올라가며 구겨지는 곳을 손으로 문대 편다. 마치 무언가 각을 잡아 정리해야 한단 버릇이 든 것처럼. 조금의 틈을 두고 곁의 빈자리에 앉고.) 넌 바닥이 안 어울려.
CA
(그러게, 로미오와 줄리엣도 아니고. 강박적인 행동을 눈여겨보다가 고저 없는 어조로 나직이 덧붙였다.) 너 없는 어중간한 잠자리보단, 네가 있는 바닥이 나아. (손톱으로 애꿎은 이불자락을 조용히 구겨뜨리다가 여전히도 거리를 두고 주저앉은 그를 돌아보았다. 누운 채 몸을 틀어 무릎과 종아리 사이에 머리를 비스듬히 기댔다. 시선을 들자, 피골이 상접한 턱과 아무렇게나 흘러내린 젖은 머리가 시야에 담겼다.) 듣고 있다면 전해 주든지. 뭐가 미안하냐고 물어봤잖아, 그때. (손을 위로 뻗었다. 피와 거스러미가 뒤엉켜 굳은 성긴 아랫입술. 유려한 곡선을 따라 엄지로 훑듯이 매만졌다.)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 살아 있다는 사실을 알아주지 못해서. 네 헌신과 정성 중 무엇 하나도 제대로 갚지 못해서. ……. (침묵하곤,) 아자노에서 내가 널 구해주지 않았더라면, 네가 희망을 품고 기다리는 일도 없었을 텐데.
CA
미안해. 내가 네 친구라서.
barnes
(처음엔 손이 부들부들 떨리는 것이 허기 때문인 줄로만 알았다. 며칠 근기 있는 것 삼키지 못했으니까. 심장 박동이 거세지는 것도 피로로 인한 것이라 생각했다. 가만히 그의 말에 귀 기울이면 이 감정이 분노인 것을 깨닫는다. 회색빛 시선이 까맣게 물든다.) 그걸 미안해해야 하는 게 아니야. (설명하려 몇 번 말을 더듬, 더듬 꺼내다 제대로 문장 하나 완성하지 못하는 자신에게도 짜증이 치밀어 입술을 씹고 손바닥을 긁는다. 비릿한 혈향에 몸서리치며. 복잡해. 왜 이런 걸 말하게 하는 거야?) 네가 죽으면 안 됐어. 죽고 싶어하면 안 돼. (반즈는 생각한다. 설령 자신을 찾아오지 않았어도 남은 삶을 행복하게 살았더라면 괜찮았을 거라고. 그런데.)
barnes
넌 내가 네 부고를 신문 기사로 접하게 했어. 내가 없을 때마다 미친 짓을 했어, 너 자신을 아무렇게나 다뤘다고. 나한텐 유일한 삶의 이유였던 걸.
CA
(잇새로 부르튼 입술을 사정없이 짓씹으려던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그의 입가에 머물리던 손을 조금 더 깊이 밀어 넣었다. 혀와 미적지근한 점막을 파고든 엄지로 어금니를 막아세운 채,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그를 꿰뚫듯 응시했다.) 살아 돌아가서, 스토크 클럽에 갔을 수도 있겠지. 페기 카터와 춤을 출 수도 있었을 거고. (21세기의 사람들은 그들이 일궈놓은 세상을 보고 제가 기뻐하기를 원했다. 정작 그들의 영웅은 그저 잃어버린 것들 틈에 파묻혀 있기를 바라는 줄도 모르고. 장탄식이 눅눅한 실내를 울렸다.) 화내지 말고, 들어 봐. 벅. 아마 난 겉치레뿐인 종전 선언이 끝나자마자 입속에 권총이나 쑤셔넣었을거야. 아니면 임무 도중 자연스레 행방불명됐겠지. 내가 뭐든지 해낼 수 있다고 떠들어대는 사람들과 섞여 사는 것만큼은, 난 절대로 해낼 수 없어. 전쟁 전에도, 전쟁 후에도. 내 삶의 모든 것이었던 널 희생시켜서 유지된 평화를 누리면서 연명하고 싶지도 않았어. 무엇보다……. (그제야 힘없이 입꼬리를 올렸다.)
CA
네가 없는 고향 같은 게 나한테 무슨 의미가 있어?
barnes
(입 안에 손가락 들이밀면 이로 살을 찢기 직전에 턱 부들부들 떨며 멈춘다. 바로 이런 미친 짓 말이야. 물리면 어쩌려고 그랬냐고. 화내지 말고 들어보라는 말에도 여전히 눈은 날카롭게 치켜뜬 채 바라본다. 눈 안쪽이 축축하게 젖어드는 순간에도 그 감정을 분노라고 믿었다. 눈꺼풀 내리감는 대신 흰자가 붉어질 때까지 뜨고 있으면 물기는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대신 눈 안에서 말라붙었다.) ...... 반즈는 화가 나 있었어. 너는 그가 사라진 순간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따라 인체 실험에나 자원했고. 내가 물었을 때 넌 그 실험에 대해서 아는 게 하나도 없었어. (시점이 일인칭으로 바뀌는 것조차 깨닫지 못한 채 횡설수설. 기억에도 없던 과거가 절로 끄집어내진다. "효과는 사라지지 않는 거야?" "몰라," 그렇게 대답하던 신난 얼굴을 한 대 치고 싶었던 건 기억한다.) 넌 지금 내 입술 찢기는 것 하나 견디지 못하면서. 내가 죽음을 논하는 것엔 끔찍하게 화를 낼 거면서 지금...... (지쳐 늘어졌던 몸을 반쯤 일으켜 주변을 둘러본다. 날카로운 것을 찾아.) 내 몸에 무슨 짓을 하든 개입하지 않겠다 했지.
CA
(얼핏 잔상처럼 스친 그의 눈꼬리는 붉게 부어오른 데다. 가닥 진 모세혈관이 충혈되어 핏물이라도 괸 듯했다. 축축한 손가락을 재킷 윗주머니에 넣어 뒤적이는 동안 오래된 축음기를 턴테이블에 올려 재생하듯, 그 순간에 나눈 대화를 뇌리에서 재생했다. 나 없는 사이에 멍청한 짓 하지 말라고 했던 건 벌써 다 잊었냐는 그의 윽박 앞에서도 태연하게 답하던, 얄미우리만치 어리석던 자신의 목소리. '하지만 널 구한 건 멍청한 일이 아니잖아.') 맞아. 해 봐. (묵직한 권총을 꺼내 들자 불 꺼진 조명 아래 총신이 번들거렸다. 슬라이드를 뒤로 당기자, 약실에 탄환이 물리는 진동이 손바닥을 타고 전해졌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총구를 자신의 관자놀이에 밀착시켰다. 차가운 감촉이 피부를 파고들었지만, 눈빛은 오히려 평온했다.) 이건 개입이 아니고, 난 아직 그 말은 입에 담지도 않았으니까.
barnes
(권총이 눈에 들어오면 움직임이 멎는다. 스스로 머리에 총 겨누는 모습에 기어코 입 밖으로 울음인지 비명인지 모를 소리가 튀어나온다.) 약속했잖아. (스티브 로저스더러 누가 멍청하다 했는가? 그는 자신이 무엇을 견디지 못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고 그걸 좋을 대로 휘둘렀다. 약속하지 않았냐는 말을 몇 번이고 반복하다 결국 두 팔 축 늘어진다.) 안 죽는다고. 그냥, ...... (힘들어. 차라리 몸의 고통으로 회피하고픈 심정이었다. 피부 아래 절망과 혐오 그런 것들 어떻게든 긁어내야 했으니. 그조차도 못하게 할 심산이냐며 눈 부라리고.) ...... 알았으니까 내려놔.
CA
('공포에 의한 복종보다, 기억에 기반한 보호 본능을 자극하는 것이 더 효과적으로 작용한다. 특히 스티브 로저스와 닮은 핸들러의 경우, 단순히 명령을 수행하는 것을 넘어 안전을 과하게 챙기거나 위협에 필요 이상으로 반응하는 등 보다 능동적인 형태로 역할에 적응했다.' 키릴 문자로 적힌 기록을 떠올리며 느리게 손을 내렸다. 지금 자신의 행동이, 그토록 증오하던 하이드라와 무엇이 다르냐고 묻는다면 침묵할 수밖에 없으리라. 그러나 개인에게 있어선 아무런 가치도 없는 목숨이, 결코 놓쳐선 안 될 친구 이상의 존재를 향해 쐐기로 작용하고 있다면 그럭저럭 용도를 다한 셈이고. 총신을 여전히도 놓지 않은 채, 손을 달라는 듯 빈손을 뻗어 보이곤,) 그 정도로 괴로워? 못 견딜 정도로?
barnes
(총구가 머리에서 떨어지는 걸 눈 크게 뜬 채 좇았다. 완전히 내려놓지 않았으니 들이켰던 숨을 개운하게 내뱉지도 못한 채 조급한 호흡으로 가슴을 들썩인다. 빈 손과 그의 얼굴으로 번갈아 시선 던진다. 하이드라의 핸들러들은 저들 나름의 취향을 가지고 에셋을 길들이고 훈육했다. 하나는 저렇게 손을 뻗으면 곧장 무릎을 꿇고 그 손바닥 위로 턱을 올리게끔 교육하기도 했으며. 하지만 눈 앞의 그는 스티브 로저스다. 행위며 태도야 어떻든 금발 파란 눈이라고 해서 같아질 수 없다. 느릿느릿 그 위로 오른손 덮고 뒤이어 겹쳐 잡는다. 고개 떨구어 이마를 대고.) ...... 그래. (등 위로 이어지던 채찍질이나 여상히 대화를 나누며 가슴팍에 담뱃불 지지던 그런 것들은 실상 중요하지 않았다. 악몽에도 등장하지 않던 체벌을 그에게 읊으면 화를 내겠지만. 결국 가장 아픈 것은.) 악몽 꿀 것 같아.
barnes
이번엔 미안하라고 한 말 맞아. 그러니까 그것 좀 내려놔.
CA
……알았어. (풀어 둔 안전장치에 도로 제동을 걸자 철컥, 하는 금속음이 유달리 귀에 거슬리게 울렸다. 붙들린 손과 닿은 살갗이 축축하고 뜨뜻미지근했다. 조금 전의 긴장감이 거짓말처럼 느껴질 정도로. 손을 올려 뇌리를 헤집듯 그의 갈색 머리칼을 천천히 흐트러뜨리자 비벼 부스러지는 소리가 적막을 타고 나직이 퍼져나갔다.) 그렇게나 스스로를 괴롭히고 싶다면, 차라리 나한테 얘기해. 적어도 내가 보이는 곳에서 해. ……필요하다면 내 손으로 할 거니까.
barnes
(총을 떨구면 발로 차 멀리 치워버리는 것은 덤. 그렇게나 열심히 도망 다녔으면서 살갗이 닿으면 헐떡임이 고르게 정리되는 꼴이 우스웠다. 머리칼 쓰다듬는 손길엔 길이 잘 든 개새끼마냥 눈 감고. 아무리 생각해도 '버키'라는 이름은 이 놈이 개 같다며 지어준 게 틀림이 없다. 떠오르지 않는 기억에 제멋대로 결론을 내리다가.) ...... 네가? 뭘 어쩌려고. (고문이나 체벌 같은 행위엔 치를 떨 것 같았는데. 해봤자 뺨이나 몇 대 때리겠지......)
CA
그걸 미리 말하는 바보가 어딨어? (온몸에 체중을 실으며 쉽게 무너져 내리는 몸을 받쳐 안은 채, 한 팔만으로 공간을 더듬어 냉장고와 서랍을 꼼꼼하게 뒤졌다. 라벨도 없는 생수 두 병. 서랍에서 찾아낸 초콜릿 두 개가 성과의 전부였지만. 포장을 까서 입에 밀어 넣어주고는 마저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귓가에 낮고 다정한 음성을 흘려보냈다.) 날 밝는 대로 빵이라도 사 와야겠네. 적어도 며칠은 굶었을 거 아니야. (마치 세상을 그로부터 완전히 차단하려는 듯, 빈틈없이 품에 가둔 채 눈가를 손바닥으로 덮어 눌렀다.) 눈 감고 있어.
barnes
(질질질. 그 품을 벗어나려면 얼마든지 발버둥 칠 수 있었겠으나 몸에 힘이며 전의며 전부 빠져나가 축 늘어진 채였다. 물 먹은 솜처럼. 분노와 스스로조차 몰랐던 슬픔으로 달아올랐던 피부는 다시 햇빛 보지 않은 창백한 색으로 돌아가고. 열기 품었던 눈동자도 흐릿한 회빛으로 초점이 간혹 비껴나간다. 입 안으로 밀려들어오는 초콜릿은 '혀가 아픈 맛'으로 정의내린다. 아릿할 정도로 자극적이었으니. 느릿하게 씹어 넘기고.) ...... 괜찮아. (먹는 행위에서 즐거움을 느끼는 것도 아니었으며 굶어도 일주일 정도는 어려움 없이 기능할 수 있는 몸이다. 어느 샌가 쉰 음성이 귀에 거슬려 큼큼.)
CA
(헛기침으로 목을 푸는 시도를 흘려듣는다. 자장가 대신, 입술을 닫은 채 목울대에서부터 낮은 울림이 시작되었다. 가사 대신 비어져 나온 웅얼거림은 누군가를 달래는 말인 동시에, 서로에게 건네는 위로 같기도 했다. 일정한 박자로 등을 토닥이는 손길에 맞춰, 가사 없는 음절이 정체된 공기 중으로 흩어졌다. 목 안쪽에서 잘게 떨리는 잔향이 끊어질 듯 이어지며 새벽의 정적을 메웠다.) ……이 노래, 키티 칼렌이 취입한 음반. ('It's been a long, long time.' 느린 선율이 끝날 때쯤 허공에 대고 속삭였다.) 하루 종일 들었거든. 네가 없는 동안.
barnes
(구슬픈 멜로디. 기억엔 없지만 반즈 - 댄스 클럽을 좋아하고, 음악에 맞추어 발장구 치는 걸 좋아했던 버키 반즈 - 는 로저스의 음색에 금세 어울리는 트럼펫 소리를 상상해낼 수 있었다. 반즈였다면 21세기의 댄스 음악에도 쉽게 적응했을까.) ...... 다른 것도 좀 듣지 그랬어. 흥겨운 것. (몸을 뒤챈다. 병 같은 건 걸리지 않는 몸이 됐음에도 뼈대에 서늘함이 스몄는지 매일 욱신거림을 달고 살았다. 모르지, 하이드라를 벗어나면 어딘가 망가지게 설계되어 있는지도......) 임무에 나가면 음악 듣는 애들이 있었어. 아직 어린. 이상하다고 생각했던 기억이 나. 사람 목소리가 아닌 기계음이. ...... 내 목소리도 그렇지만. (여동생을 어르던 부드러운 음성도 또래 여자애들에게 춤 신청하던 매끄러움도 사라진 채 왼팔에 나는 쇳소리가 목에서도 울리는......)
CA
글쎄. 난 익숙한 것에 더 손이 가더라고. 변하고 싶지 않았던 건지도 모르지. (하염없이 쓸어내릴 때마다 조금씩 움찔거리는 어깨와 날개뼈를 가볍게 주무르다가, 손을 뻗어 툭 불거진 목울대를 조심스럽게 매만졌다. 말을 할 때마다 느껴지는 진동의 감각이 좋아서 빙그레 웃곤,) 내 귀엔 듣기 좋기만 한데. 별로 변하지도 않았어. 넌 내가 알던, 걱정도 많고 눈물도 많았던 그 버키 반즈가 맞아.
barnes
기억 못한다고 자꾸 지어내지 마. (반즈가 그 앞에서 눈물 보인 기억은 없다. 아직은.) 반즈도 나도 안 울어. (방금 화를 낼 때도 울지 않았는데 언제 눈물이 많았단 거야. 목울대에 미지근한 온기 닿으면 숨 한 번 위로 튀어오르고. 내일은 떠나버리겠단 다짐은 까맣게 잊어버린 채 그의 품에 웅크려 안긴 꼴이란.......) 그리고 난 반즈가 아니야.
CA
네가 잊었으니 다시 알려주자면, 난 거짓말은 안 해. 너한텐 더더욱. 우린 눈빛만 봐도 서로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부 알아보는 사이였고, 따라서 속이는 건 아무런 의미가 없거든. (옷깃과 젖은 샤워 가운이 아무렇게나 뒤엉켜 구겨지는 소리, 가느다랗게 이어지는 호흡과 작은 속삭임, 손이 뺨과 허리를 타고 내려갔다가 왼쪽 어깨를 부드럽게 쓸어내리면서 나는 소음이 적막 속에서 유난히 선연해졌다.) ……걘 내가 아팠을 때, 나보다도 더 슬퍼하면서 울었고. (거의 잠들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긴 침묵이 지나고 나서야,) 난 지금도 그 이유를 잘 모르겠어.
barnes
그래, 알겠어. 걘 울보인 걸로 해. (짜증스럽기까지 한 대꾸였다. 나는 걔가 아니라니까. 지금 나 누구인지도 모르겠는데 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떻게 알겠냐며. 하지만 그래. 반즈가 그 앞에서 늘 발가벗겨진 기분이 들었겠다 싶다. 꿰뚫는 듯한 새파란 눈 아래 숨길 수 있는 건 없었겠단 그런. 괜히 샤워 가운 자락을 모아 여며든다. 나는 아직 숨고 싶으니까.) ...... 다 아는 사이였다며. 왜 몰라. (괜히 딴지를 건다. 그가 핸들러였다면 말대답 했단 이유로 옛적에 뺨을 서너 대 맞았을 테고. 그런데 왜 모를까, 당연한 것 아닌가. 반즈는 삶의 이유를 스티브 로저스에서 찾았다. 다른 무엇보다도 그가 행복하게 오래 살길 바랐고 그를 위해 가리는 일 없이 자신의 생명도 갈아넣었다. 실패했다고 생각했겠지. 최선을 다했음에도 친우를 구할 수 없었단 자괴감. 까슬한 입술을 달싹. 손톱 옆 거스러미도 툭툭 뜯어내며 말을 찾는다.) ...... 내가 아니라서 미안. 반즈가 아니라서.
CA
……. (그러니까, 뭐든지 잘할 수 있고 머리도 좋고, 여동생도 셋이나 있는 데다. 여러 방면에서 능력도 탁월한 녀석이 뭐가 아쉬워서 가난뱅이에 시한부인 꼬맹이의 인생을 책임지고 싶어서 안달이냐는 소리였는데. 온전치 않은 기억을 지닌 그에게 물어볼 만한 질문은 아니었기에 잠자코 입을 닫았다. 이건 당사자에게 직접 물어볼 문제이기도 했고, 이 이상 건드렸다간 정말로 두 번 다시 보지 않겠다고 선언할지도 모르니까. 바람 빠진 소리를 내며 웃다가 고개를 숙여 이마에 머리를 맞댔다.) 괜찮아. (눈동자가 마주치자 입 모양으로 천천히 되뇌었다. '곁에 있어 줘서 고마워.' 이내 눈꺼풀의 틈이 서서히, 마치 촛농이 녹아내리는 것처럼 느리고도 위태롭게 감겼다. 다만 옷깃과 등허리를 쥔 손아귀는 허옇게 질릴 만치 세게 붙든 채로, 마치 두고 가지 말라고 간절히 부탁하듯이.) ……잠시만 쉴게, 벅. 금방, 금방 괜찮아져. …….
barnes
(침묵이 이어지면 데굴데굴 소리가 날 정도로 눈동자를 굴려 눈치를 살핀다. 푸슬푸슬 웃음소리가 주변으로 흩어지면 그 소리가 듣기 좋다고 생각하며. "바보." 잠에서 깨어난 반즈와 제 의식이 같은 생각을 하는 순간이었다. 몸집이 커지고, 대위라는 직위에 걸맞게 말투가 딱딱해졌으며 음성에 힘이 실렸다지만. 말 하나하나 다 무시하고 결국엔 저와 바닥에 누운 제멋대로의 사내가 되었다지만. 결국 곁에 있다는 사소하고도 당연한 일에 고맙다 말하는 건 같았다.) ...... 그래. (어찌나 세게 붙들고 있는지 눈이 감기는 순간에도 팔부터 어깨까지 힘이 바짝 들어간 것이 보였다. 일반인이었다면 그 손아귀에 멍이 들었을지도 모르겠다. 오른손으로 옷깃 쥔 손등을 한 번 쓰다듬고. 그럼에도 여전히 시허연 빛인 손에 한숨을 내쉬고 목덜미로 손길을 옮겼다. 잠들어 제 음성이 닿지 않을 것 같을 즈음에.) 쉬어, 스티브. 잘 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