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2. 20. 22:59
barnes
일어나.
CA
……. 깼어. 한숨도 안 잔 거 다 보이거든.
barnes
말했잖아, 악몽 꿀 것 같다고. 안 자는 게 나아.
CA
그러다 기절한다니까. 내가 보는 동안엔 별일 없을 거야. 걱정하지 말고 쉴 땐 꼭 쉬어. 그러지 않으면 나도 안 잘 거야.
barnes
기절하면 네가 알아서 챙겨 가든 하겠지. 내 꿈까지 쫓아들어올 것도 아니고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 자꾸 네 몸 이용해서 나 협박하는데.
CA
가진 게 70년 치 연금과 스테로이드로 부풀린 몸밖에 없어서 미안하게 됐어. 네가 말을 잘 들으면 나도 얌전히 있을 테니 걱정 마. ……해보지 않으면 모르는 거잖아. 벅. 안 그래?
barnes
언제는 떠나지만 않으면 내 몸 해치는 것도 도와주겠다더니 자꾸 명령이 다양해지잖아. ...... 잠이 안 온 건 내 잘못이 아니야. 네가 미친 짓을 한 탓인데 왜......
CA
친구를 염려하는 건 미친 짓이 아니라 당연한 거야. 감정이 궁금하다고, 상호 작용이 뭔지 알고 싶다고 해서 따라온 건 너잖아. 그렇지? (손가락 두 개를 세워 눈앞에 뻗어 보이곤,) 몇 개로 보여?
barnes
아직까진 너한테서 배운 게 없잖아. 자꾸 날 반즈와 겹쳐 보기만 했지. (흘끔. 멀쩡히 두 개로 보이지만 괜히......) 네 개.
CA
말 안 듣고 딴지 거는 건 너나 걔나 똑같거든. (손가락으로 눈 푹 찌르는 시늉하곤,) 네가 버키든, 아니든. 널 소중하게 생각하는 마음이 변할 일은 없어. (가볍게 뺨을 손끝으로 건드렸다.) 겉보기엔 똑같잖아. 정확히 어떤 점이 다르다는 건지 모르겠는데.
barnes
너도 내 말 안 듣잖아. (나 같아도 짐승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진 않겠다만. 속으로 한 생각을 어디까지 입 밖으로 냈는지 모르겠고. 움찔.) 달라. 머리도 길어졌고......
CA
그렇구나, 아자노에 단신으로 쳐들어간 200파운드짜리 돼지는 스티브 로저스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나 보다. (생각보다 말랑하네. 가볍게 한 번 더 찌르다가 눈을 들곤,) 설득력이 부족한데. 다른 건?
barnes
왜 자꾸 찔러. (고개 뒤로 내빼고.) 내가 아니라는데 뭐가 더 필요해? (말에 절박함이 스민다. 나는 버키 반즈가 아니고 너도 그걸 인정해야 해.) 너도 그렇게 생각하잖아. 나 같이 역겨운 놈한테 네 친구 이름을 붙이고 싶어?
CA
난 네가 역겹다고 생각했던 적이 단 한 번도 없는데. (처음 옥상에서 조우했던 암살자를 떠올리느라 호흡이 느려졌다. 즐거운 한때를 회상하듯 입매가 틀어진다.) 눈이……. 슬퍼 보인다고는 생각했지.
barnes
나는 슬프지 않았어. 그런 감정 따위 모르니까. (가르쳐 주겠다면서 자꾸 말싸움만 하는 것에 느끼는 게 짜증 혹은 분노인 것 같긴 하다.) 나는 내가 더럽다고 생각해.
barnes
도와준다며. 내 살이나 좀 도려내 봐.
CA
전시된 작품은 자신이 슬픈 줄도 모른다더니. (옅은 한숨을 내쉬곤 반쯤 뜬 눈으로 고집스러운 청회색 눈동자를 응시했다. 널 이용한 하이드라를 원망하는 대신 스스로를 자책하는, 네 지나치게 선한 태도야말로 네가 버키라는 가장 명징한 증거야. 이 멍청아.)
CA
그런 걸 도와준다고 말한 기억은 없는데. (몇 가닥 흘러내린 앞머리를 뒤로 빗어 넘긴 손을 그에게 내밀곤,) 칼 있어?
barnes
그것도 아니야. (자꾸만 비껴나가는 그의 대답에 그렇잖아도 뾰족하게 세워졌던 눈꼬리에 힘이 바짝 실린다. 아름답게 세공된 보석이나 섬세하게 조각된 대리석 상과는 다르다. 사슬에 묶인 개새끼면 몰라도 작품이라니.)
barnes
한다고 했어. 필요하면 널 부르라며. (불렀단 사실에 칭찬이라도 바라듯. 소매 안쪽에서 미끄러지듯 흘러나온 나이프를 건네고.) 필요해.
CA
맞아. 넌 내가 인정한 유일한 모델이었으니까. 제대로 그릴 줄도, 다룰 줄도 모르는 놈들이 가져가서 그렇지. (즐겨 사용하던 양날 거버 마크가 아닌 투척용 스켈레톤이다. 매우 얇고 날렵한. 엉망진창으로 뒤엉켜 곪아가는 속을 감추듯 링에 검지를 걸고는 가볍게 돌려보다가,)
CA
혼자 안 하고 내가 깰 때까지 기다렸던 거야? (손을 뻗어 부슬거리는 머리를 감싸듯 쓰다듬었다.) 착하네.
barnes
(흑연 손에 든 그의 앞에서 온갖 우스꽝스런 자세를 취해 보이던 반즈의 기억이 떠오른다. 지금보다 더 작고, 약한 로저스. 웃음 그 끝에 대롱대롱 매달려 살던 멍청한 버키 반즈. 말없이 상의를 걷어올린다.)
barnes
(어제 구입했던 택조차 떼지 않은 새 옷들이 아닌 여기 올 때 입었던 허름한 후드티를 벗어 옆에 개어 두고. 그가 나름의 '예술 활동'을 할 깨끗한 구석이야 살결에 남아있지 않다지만......) ...... 그런데 네가 늦게 일어났어. (괜히 투덜대며 쓰다듬는 손길 따라 고개 기울이고.)
CA
……. (분노가 임계점을 넘으면 무감각에 수렴한다던가. 비인간적인 훈련과 고문, 존엄성이 완전히 거세된 과정이 얼룩진 켈로이드와 검푸른 상흔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를 그렇게 만든 가해자들에 앞서 분노하고, 복수해야 할 대상은 따로 있지 않던가. 그때 그 손을 놓친 건 누구였지? 찾으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던 사람은? 그가 짐승처럼 길드는 동안 아무것도 하지 못한 무책임한 방관자는?) 네 말이 맞을지도 모르겠네. 넌 내 친구이기 이전에 사람이니까.
CA
(떨리는 손으로 그의 상반을 짚었다. 왼손으로 제 손등 위를 겨냥하고, 그대로 내질렀다. 날이 살을 가르고 들어오는 감각. 차가운 얼음송곳이 손등과 뼈의 인대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는 느낌. 살가죽이 팽팽하게 당겨지다 푹, 부질없는 소리와 함께 찢어지자 비릿한 쇳내가 코끝을 찔렀고, 뒤이어 체온을 구분할 수 없게 된 손끝이 파르르 경련했다.) 누구도 너에게 그럴 권리가 없었지, 사실은. …….
barnes
(에셋도 버키도 아닌 저는 놀랍게도 방금 전까지 꽤 평온하고 심지어는 포근하기까지 한 기분에 젖어 있었다. 상대에게 제 살갗을 찢어달라며 칼을 건네면 마치 어떤 짐을 떠넘긴 듯한 홀가분함이 찾아왔고, 쓰다듬는 손길부터 잘 기다렸단 칭찬까지. 그에 젖어 첫째 그가 얼마나 미친 인간인지를 잊었고 둘째 그가 복잡한 낯으로 제 상반신 훑는 것을 놓쳤다. 무언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 채는 것이 늦어졌단 뜻이다.) 미쳤어? (번뜩 눈 뜬 채 뒤늦게 거리를 좁히지만 어쩔 줄 모르며 그를 향해 손조차 뻗지 못했다.)
barnes
(손끝의 떨림이 시야에 들어오고 나서야 왼팔에 힘 실어 그의 팔을 잡았다. 옆에 벗어둔 옷가지를 아무렇게나 주워 들어 상처 옆을 누르고. 헐떡이는 숨소리는 누구 것이며 피에 섞이는 눈물은 또 누구 것인지. "약속했잖아" 하고 떠오르는 말은 음성을 타지 못하고 입 안에서 죽어간다.)
CA
(제 손등을 관통한 금속을 단단히 거머쥐고 당기자, 내부에서 일그러진 칼날이 뼈와 마찰하며 불쾌한 진동이 팔꿈치까지 전해졌다. 벽에 박힌 이물질을 보듯 무심한 시선을 한 채 손가락 마디마디에 힘을 주었다. 마침내 날붙이가 완전히 뽑혀 나가 바닥으로 떨어지며 챙그랑, 날카로운 소음을 냈다. 뜨거운 피가 손등을 타고 흘러 지혈하던 옷가지와 소매를 적셨지만, 호흡은 지나칠 정도로 일정했다.)
CA
……너만큼은 아닐걸. (고통은 선명했다. 그러나 표정을 바꿀 만큼 의미 있지는 않았다. 팔을 쥔 그의 손을 겹쳐 누른 채,) 나쁘지 않아. 네가 왜 이런 짓을 하는지 이해가 가네. 통증이 번잡한 상념과 죄책감을 꽤 효과적으로 끊어내는 것 같아. (이내 손을 옮겨 눈가의 물기를 엄지로 훑곤,) 하지만, 그러면 안 돼. 지금은 하이드라 소속이 아니잖아.
barnes
(그럴 정신이 있었다면 드디어 제가 '미쳤다' 라는 둘 모두가 동의하는 지점이 생겼다는 점을 비꼬았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반즈가 아니, 내가 사랑하던 예술가의 손으로부터 섬짓한 칼날이 뽑혀나오는 것에서 눈을 떼지 못했고. "너 내가 그 손을 얼마나 소중히 여겼는지 알면서도 그런 짓을 해," 여즉 숨조차 제대로 들이키지 못해 큰 눈에 원망을 짙게 칠한다. 버리고 갈 것이 하나 늘었다. 자신은 저 칼을 다시는 제대로 바라보지 못할 테다.)
barnes
...... 앞으론 너 깨는 걸 기다리는 바보 같은 짓은 하지 않을 거야. (깜빡임 따라 남은 눈물을 흘려보낸다. 뺨이 땀과 눈물로 축축하게 젖어들고. 그의 방법은 효과적이었다. 며칠은 살갗에 칼을 대지 못할 게 분명했다.) 또 그랬다간 남은 팔도 잘라버릴 거야.
CA
기상나팔이라도 불러주게? 나야 좋지. 그리고 오늘은 네가 자는 걸 보기 전까지 먼저 안 잘 거니까 그렇게 알아. 벅. (너덜거리는 손바닥을 가볍게 쥐었다가 폈다. 저릿한 통증을 제외하면 확실히 아물어 붙고 있다. 버릇을 저지하는 데 이만하면 싼값이지. 아무렇게나 늘어진 옷가지와 옷을 그의 맨 어깨에 걸쳐주었다. 손을 올려 불규칙적으로 들썩이며 비정상적인 궤도를 그리는 등허리를 차분하게 쓸어내리다가,) 천천히 들이쉬어. 너 지금 숨을 제대로 못 쉬고 있잖아.
barnes
(그게 지금 누구 탓인데. 발갛게 짓무른 눈이 그를 쏘아본다. 가슴께가 답답하게 눌려 숨을 몇 번이고 크게 들이켜도 도무지 개운해지지가 않았다. "이제 네 도움 따위 받고 싶지 않아," 그렇게 대꾸하고 싶었으나 진정되지 않는 호흡에 결국 그가 이끄는 속도에 맞추어 숨을 고르는 수밖에 없고.)
barnes
오늘도 악몽을 꿀 거야. 이게 다 너 때문이야...... (눈이라도 감았다간 오른손이 뭉개진 스티브 로저스가 저를 괴롭힐 것이 뻔하다. 차라리 눈앞에 살아있는, 상처가 아물어가는 그를 바라보는 게 났다.) 먼저 누우라고.
CA
그래, 맞아. 네가 이렇게 된 건 전부 내 잘못이야. 앞으로도 그렇게 말하면 돼. 널 고통스럽게 만들고, 네가 꾸는 나쁜 꿈의 원흉은 전부 나라고. (널 탓하는 것보단 훨씬 진실에 가까울 테니까. 고통의 원인을 정의하는 순간, 뇌는 상황을 통제할 수 있다고 착각한다. 억눌린 감정을 쏟아내는 배출구 역할 정도는 가능하지 않을까. 시키는 대로 바닥에 머리를 대고 눕자 거꾸로 뒤집힌 안면과 마주친다. 손을 뻗어 부은 눈가에 괸 물기를 검지로 쓸었다. 굳게 다문 입술 끝을 느리게 끌어올렸다.) 심지어 넌 나 때문에 자유롭지도 못하잖아. 옛날이든, 지금이든.
barnes
...... 상관 없어. (반즈가 원했던 건 당초에 자유 같은 게 아니었으므로. 로저스에게 묶여 여생을 보낼 수 있다면 한 점 후회 없이 그러고자 했을 테니. 그것을 알기에 더더욱 반즈의 자리를 제가 꿰차는 것에 자괴감이 든 것이었다.) ...... 노래. 불러줘. (지겹도록 들었다던 그 노래를 말하는 것임은 말하지 않아도 알겠지. 옆에 누워 몸을 둥글게 말고. 오른손은 그를 향해 뻗어둔 채.)
CA
하여간 귀엽다니까. 너무 늦게까지 깨어있지 마, 버키.
barnes
어디에서 귀여움을 느낀 건지 도통 모르겠다. 자, 로저스.
CA
(미간 가운데 툭.) 사람 놀라게 하면 못 써. 벅.
barnes
내가 언제 널 놀라게 했어.
CA
많이 놀라진 않았지만. 네가 고집 센 게 하루 이틀도 아니고.
barnes
놀라게 안 했어. 내가 뭘 어쨌다고......
barnes
자려고 한 것 아니었어?
CA
너도 눈 감고 있으라고. 그리고 이건 듣다 보면…….
CA
너, 아니. 버키 반즈가 춤추던 게 생각나거든. 그건 그렇게 나쁜 꿈은 아니잖아, 그렇지?
barnes
...... 네 꿈 나눠 꾸면 되는 건가.
barnes
조금은 자 볼게.
barnes
시끄러우면 깨워.
CA
이번엔 발 밟지 않게 조심해 볼게.
CA
……손 절대 안 놓고 있을 테니까, 걱정 말고 자.
barnes
놔도 돼, 이제.
CA
……생각보다 조용했어. 아무 일도 없었고.
CA
거 봐. 내 말이 맞지?
barnes
하룻밤 무사히 넘긴 것 뿐인데.
barnes
아무 일도 없었던 건 어떻게 알아. ...... 안 잤지?
CA
잠깐씩은 졸았어. 너무 그런 눈으로 보지 마.
barnes
안 봤어. 네가 찔린 거지.
barnes
손은. 네 손.
CA
너 솔직히 말해. 날 놀리는 게 재밌는 거지?
CA
……. 멀쩡해. 이 정도는 흉터도 없이 나아. 너도 잘 알잖아. 성능도 비슷할 텐데.
barnes
내가 뭘.
barnes
흉이 졌으면 며칠은 한 마디도 안 할 작정이었어서. 아쉽네.
CA
맞잖아. 눈 돌리지 마, 벅.
CA
나랑 대화하기 싫어?
barnes
...... 그런 게 아니라.
barnes
아닌 것 알잖아. 왜 물어?
CA
버키야 나랑 눈만 봐도 서로 다 읽는 사이라지만, 넌 다르다며. 네 입으로 말하는 게 듣고 싶은데.
CA
따라해 봐. '너랑 얘기하는 게 좋아.'
barnes
...... 몰라.
barnes
말하는 게 어려울 뿐이야. 이렇게까지 많이 할 일이 없었단 말이야.
CA
알아. 그냥 따라하기만 하면 돼.
CA
네 목소리가 듣기 좋아서.
barnes
(그의 음성을 따라 덧그리듯이. 조금 갈라진 음성으로 느릿느릿.) 너랑 얘기하는 게 좋아.
barnes
만족해?
CA
(울컥 올라오는 뜨거운 기운을 누르느라 잠시 목을 매만졌다. 이내 손을 그의 머리 위에 올리곤 가볍게 긁었다.) ……착하네.
CA
나도 좋아. 혼자서 떠들지 않아도 되니까.
barnes
(흉 지지 않은 걸 다행으로 생각해, 그렇게 대꾸하려다. 행위에 대한 보상이 내려지면 퉁명스러움은 사그라들고.) 내 목소리가 듣기 싫다 했는데. 다른...... 사람들은.
CA
그야 걔넨 안목 없는 얼간이니까. (머리칼을 검지로 꼬며 단호하게 답했다. 약간 나른하면서도 들끓는 걱정을 가라앉히는 듯한 음성. 비딱하게 눌러쓴 군모와 훤칠한 외모를 지닌, 누구나 춤추고 싶어 하던 친구.) 난 항상 그 목소리가 좋았어.
CA
무슨 꿈 꿨는지 물어봐도 돼?
barnes
글쎄. 알렉스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어. (알렉산더 피어스의 이름을 생각 없이 짤막하게 던지며. 눈앞의 금발 위로 조금 더 곱슬거리던 다른 이의 머리칼을 덧씌워 보고. 깜빡, 깜빡.)
barnes
...... 어린 여자애가 있었어. 반즈가 그 애한테 춤을 가르치고 있었는데. 너는 지켜보고 있었고.
CA
알, ……. (입술이 떨렸다. 지나치리만치 예민한 것이 늘 문제였다. 그때도, 지금도. 차라리 감각이 둔했더라면. 그와 팔짱을 끼거나 손을 잡은 여자친구의 표정만 봐도 둘이 어디까지 갔는지 금세 파악하지 못했더라면. 저도 모르게 날 선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누구?
barnes
그를 알지 않아? (고개가 기울어지고. 그의 음성에 서늘함 스민 것을 알아채면 어깨가 움찔, 떨리고.) 피어스. ...... 나이가 들기 전엔 그렇게 불렀어.
barnes
매번 깰 때마다 달라져 있었거든. 다.
CA
……. 들었지. 나타샤와 퓨리가 처리했다고. (세계안전보장이사회 사무총장. 프로젝트 인사이트를 발동한 하이드라의 수장이자 핸들러. 그와 악수를 나눈 오른손을 난도질하려고 들여다보다가, 아. 이미 해버렸지. 참. 거의 살갗을 벗겨낼 기세로 세게 문질렀다.) 직접 죽여버렸어야 했는데.
barnes
...... 응, 그랬다더라. (그리움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전 핸들러의 죽음에 후련함을 느끼지도 않았다. 에셋이던 시절 그에게 남다른 애착을 느꼈던 기억도 있었다. 굳이 따지자면 원조는 눈 앞에 있는데도 그 때의 일들을 떠올려 조용히 젖어들다가.) 그렇게 부르라고 했었어. 나중엔 말하는 게 듣기 싫다 했었지만.
barnes
화났어?
CA
(그의 난도질당한 정신을 가장 잔인한 방식으로 이용한 자들에게 분노를 느끼지 않을 리가. 먼 곳을 응시하는 회청색 눈동자를 곁눈질하다가 어깨에 손을 올렸다. 네 인생에 나 같은 게 없었다면, 네가 이용당할 일도 없었을 텐데.) 조금. ……아니. 많이. (이내 조심스럽게 당겨 안곤,) 네가 힘들었을 것 같아서.
barnes
나한테 화가 난 게 아니고? (애초에 금발의 벽안이라면 모두 좋다고 꼬리를 흔든 건 자신이 아니던가. 군복까지 입히면 눈이 돌아서는. 결국 그 익숙한 모습에서 오는 편안함에 굴복하여 안주한 것도. 그 품에 안겨서 눈을 굴린다. 의아해서.)
CA
……. 안 났어. 단지 그러지 않으면 견딜 수 없었던 거겠지. (안광이 완전히 꺼진 텅 빈 눈을 바닥에 떨어뜨린 채, 천천히 흘러내린 머리칼을 그의 귀 뒤로 꽂아 주었다.) 네가 좋은 사람이 아니었다면 차라리 나았을 텐데. 나 같은 친구한테 친절하지 않았더라면 더 좋았을 텐데. …….
barnes
그렇게 말하지 마. (이번에 날카롭게 쏘아붙이는 건 자신이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로저스가 스스로를 낮추어 말할 때마다 열이 끓는다.) 네가 없었으면 반즈는 옛적에 죽었어. 기차에서 떨어지기 전에 목을 매달았든 눈밭에서 혀를 깨물었든. 결국 이 몸을 살려두고 있는 것도 너야.
barnes
멍청이. 취소할래. 너랑 이야기하는 것 싫어. 화가 나.
CA
이해가 안 가. 넌 뭐든지 잘하고, 활달하고, 친구들도 많고. 내 역할이 뭔진 나도 잘 알았어. 기껏해야 네 짐이자 들러리였지. 네가 날 수십 번은 구했던 동안 내가 널 구한 횟수는 한 번이었어. 고작 한 번. 심지어 아자노에서 살아 돌아온 친구를 전역시키긴커녕 도로 사지로 몰아넣었잖아. 삶의 이유로 여길 가치가 있었나?
CA
(한숨을 내쉬다가 손을 뻗어 그의 뺨을 가볍게 매만졌다. 마치 저보다 한참 어린 어린애를 대하듯.) 됐다. 너한테 얘기해서 뭐 해. 그냥 네가 금발 취향이었나보다, 생각해야지.
barnes
역할. (로저스는 반즈와 자신을 자주 두 역할을 수행하는 구도로 나누어 설명했다. 보호자와 피보호자. 몸이 커졌을 때는 당연스레 뒤바뀔 거라 생각했던 모양이다.) 반즈가 자신의 역할을 다하지 못했다면 버렸을 것처럼.
barnes
(뺨을 만지는 손길을 떨쳐낸다. 하이드라는 인간의 온기를 제게서 앗아가는 것을 자주 훈육의 수단으로 사용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철제 상자 속에 발가벗겨 며칠을 가두어 둔다든가. 그러니까 어쩌면 다시 뻗지 않을지도 모르는 손을 스스로 뿌리치는 것은 딴에 제법 용기를 요하는 일이었다.) 걘 널 아꼈어. 보호할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사람으로. 자기 생각이나 비밀들을 미주알고주알 네 앞에서 읊어댔지. 안타깝네. 넌 그냥 어떤 역할을 해내고 있었을 뿐인데. 연극처럼. (입을 꾹 다문다. 그 시절을 어느 정도 기억에서 끄집어냈다는 것도 들키고 싶지 않았는데 스스로 불어버린 꼴이다.) 그래. 나는 금발이 취향이라 알렉스한테도 잘만 기었어. 다른 금발이 오면 또 좋다고 꿇겠지.
CA
함부로 말하지 마. (말없이 다가가 멱살을 천천히 비틀어 쥐었다. 구겨진 옷깃이 목을 죄어오자, 눈앞의 창백한 얼굴에 희미한 핏기가 달아오르는 것이 눈에 들어왔고, 지지 않고 바짝 끌어당겨 코끝이 닿을 듯한 거리에서 시선을 맞췄다.) 감히 손도 대지 못할 만큼 좋은 사람이었어. 내가 누구인지, 어떤 사람인지, 귀찮게 설명하지 않아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믿어주던 친구였어. 병원에서 시한부 선언까지 들은 마당에, 당장 내일 비명횡사할지도 모르는데. 그런 네가 나한테 잘해줄 때마다, 내가 얼마나 행복하면서도 동시에 비참했는지 알기나 해? 난 절대 그걸 다 갚지 못하고 그전에 죽을 테니까!
CA
난 그 선량함과 한없이 올곧은 호의를 받을 만한 가치가 없는 사람이었어. 그걸 인정하기가 그렇게 어려워? 왜 넌 살아서도 죽어서도 나 때문에……. (눈물이 얼룩진 시야 속에서도 옷자락을 놓지 않으려는 듯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때리려는 의도도, 위협하려는 기세도 담겨 있지 않았다. 그저 이 손마저 놓으면 영영 사라져 버릴 것만 같은 절박함만이 엉망으로 구겨진 옷깃 위에 서려 있었다.) 설령 네가 그런다고 해도, 나한테 화낼 권리가 있을까? 차라리 네 인생의 오점과 닮은 녀석이 나타나면 쥐어패지 그랬어. 이 멍청아. ……. (멱살을 놓곤 두 팔을 어깨에 감았다. 이렇게 화내는 것도 오랜만이네. 막사에서도 자주 다투기로 유명했는데.)
barnes
(멱살을 틀어쥐면 목이 갑갑하게 죄이면서도 이상하게 후련한 감각이 찾아온다. 이제까지의 다정하고 따뜻하던 손길보다 억센 손아귀에서 더욱 평온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폭력에 길이 들 대로 든 몸을 늘어뜨리면서도 밝게 튀는 푸르름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 갚을 필요 없었다고. 나를 자원봉사자로 만들지 마. 나는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했을 뿐이야.
barnes
어려워. 내 눈에 넌 완벽했거든. 200 파운드 돼지가 되기 전에. (희미한 미소가 입가에 걸린다. 주어가 '그' 아닌 '나'로 바뀌는 것은 자연스러워 눈치 채지 못했다. 그렇게 잠시 빛을 찾은 눈동자가 허공을 맴돌아 과거의 꿈을 되새긴다.) ...... 알렉스를 몇 번 때리긴 했던 것 같은데. 길이 덜 들었을 때. (안긴 건지 안은 건지 모를 자세로 가만히 서있다가.) 그 여자애는 누구야? 어린애. 갈색머리에......
CA
(손을 올려 눈가를 찌르는 머리칼을 넘기곤 넋을 놓은 듯 그를 들여다보았다. 아주 잠시 동안, 항상 느긋하고 여유로우면서도 어디로 튈지 모르는 자유분방함을 갖췄던 사람의 그림자가 보였던 것 같아서. 물그림자가 그렇듯 손이 닿자 이지러지며 흩어져버렸지만.) 네 안목은 최악이야, 버키 반즈. 다시는 어디 가서 멋쟁이라고 하지 마.
CA
(잠시 생각하듯 눈을 내리깔고 있다가,) 돌로레스? 아니면 레베카일 수도 있어. 베티 붑처럼 눈을 깜빡이던 네 동생. (더 얘기해도 좋을지 허락을 구하듯 눈짓으로 물어보았다.)
barnes
...... 머리 이상해? (자꾸만 넘겨주는 손길이 나쁘지 않으면서도 귀찮겠단 생각이 들어서. 잘랐다간 더욱 '버키'처럼 생기게 될 텐데. 이상하게도 이 두 손은 단발머리 끈으로 묶는 법을 기억하고 있었다.) ...... 동생. (그래. 그 애 머리를 묶어주곤 했다. 베티 붑이 뭔진 모르겠지만 커다란 밤색 눈동자에 기다란 속눈썹의 여자애가 떠오른다.) 동생이 있었어.
CA
길어도 보기 좋은데. (뭘 하든 잘생겼으니까. 한 손으로 쓸어 넘기고 모자를 눌러쓰던 손동작을 떠올리며 손을 거두었다. 뒷말은 적당히 입안에서 흐트러뜨린 채,) 만지는 게 불편하면 그만 손댈게. (턱을 어깨에 깊게 묻고 체중을 실어 압박하며 나직이 답했다. 이건 뭐, 서로를 인질로 잡은 패잔병도 아니고.) 버키는 종종 농담 삼아서 자기 여동생이랑 결혼할 생각이 없냐고 물어봤고. ……난 '네 동생까지 뒷바라지하게 만들고 싶지 않다.'라고 거절했어.
barnes
아니...... (때론 누구에게라도 닿고 싶어 주먹질까지 빌어 얻어냈단 말을 해버리면 또 그의 얼굴이 엉망이 되겠지. 짓눌리는 감각에 때아닌 웃음이 터진다. 자기 무거운 건 알고 - 돼지라고 칭한 걸 보면 알겠지만 - 이렇게 구는 건지.) 안 불편해. 괜찮아. ...... 가족이 되고 싶었나보지. (기억은 나지 않아도 그 생각이야 짐작할 수 있다. 반즈의 의식에 가장 가깝게 맞닿아 있었으니까. 가족. 잠시 로저스의 집에서 함께 사는 상상을 한다. 타워로는 데려가지 않겠다 약속했으니까. 그런데...... 미간이 좁아진다.) 난 감옥에 가야 하는 것 아냐?
CA
……나도 알아. 아니, 알았어. 하지만 나랑 같이 살게 될 네 동생은 무슨 죄야. (아이답게 투정도 부리면서 오빠를 곧잘 따르던 그 여동생들. 별다른 노력 없이도 버키 반즈로부터 사랑받던 그들을 내심 질투했다는 것만은 죽어서도 말 못 할 어리석음이었다. 숨을 깊게 들이마시자 값싼 샴푸 냄새와 비누 향, 그 밑에 엷게 깔린 서늘한 체향이 맡아졌다. 몸을 틀어 침대 모서리에 걸터앉곤 그를 제 곁에 앉힌 채 가만히 응시했다. 두 사람분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 스프링이 비틀리는 듯한 비명을 지른 건 덤이다.) 그렇게 안 둬. 네 의지로 저지른 죄는 단 하나도 없잖아. 괜한 짓 하지 말고, 특히 자수 같은 건 절대 하지 마. 무슨 일이 있어도 널 끝까지 보호할 거니까.
barnes
(반즈는 제 입을 빌려 "그 애들도 널 좋아했어" 라고 말하려 했지만. 나는 모르니까. 여동생의 이름도 이제서야 알게 된 주제에...... 튀어나가려는 말은 습관처럼 입술을 씹어 삼킨다. 그에게도 이런 버릇이 있었을까. 입술을 물고 손톱을 괴롭히는. 아마 스스로 살점에 칼 대는 버릇은 없었겠지. 생각이 나도 눈앞의 그가 '도와준다'고 약속했던 일은 이제 믿지 않기에 칼 찾는 대신 손으로 목덜미를 죽 긁어내린다. 귓가에 울리는 경쾌하다 못해 기괴한 스프링 소리에 흠칫.) ...... 반즈의 의지는 아니었겠지. 그런데 나는 내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었어. (행위의 의미는 몰랐으나 그것이 면죄부가 될까. 차라리 죗값을 치르는 게......) 감옥이 낫지. 그러면 아무도 해칠 수 없으니까.
CA
고문과 학대에, 세뇌까지 당해 선택권이 박탈당한 상태였어. 뭐가 옳은지 그른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저지른 범죄에 책임을 물을 순 없어. 증거만 있다면 네 의도가 아니었음을 증명하는 건 어렵지 않아. 다만. (두 번 말하는 대신 손목을 강하게 잡아채 자신을 향해 잡아당겼다. 나무라는 듯 고개를 가로젓고는,) 너에 대해 알려지는 건, 확실히 위험할 거야. 적어도 네 기억이 어느 정도 돌아오고 나서, 그때 다시 얘기하는 편이 좋을 것 같아. ……그리고 네가 감옥에 가면. (불이 꺼진 지 오래된 폐허의 창문과도 같은 눈을 들어 그를 마주했다. 때마침 낡은 방이 비바람에 몸서리치는 소리가 적막을 메웠다.) 그럼 나는?
barnes
...... 증거. (그래. 남아있겠지. 일지라든가. 살갗이 불에 타면 어느 정도까지 흉 없이 나을지. 어떤 행위에 반응하며 길들이는 최적의 방법은 무엇일지. 사실 어디까지 기록이 남아있을지는 저도 모른다. 잡힌 손목이 얕은 떨림을 머금고.) 증명한다고. 그럼 그걸 사람들이 알아야 해? (진정되지 않자 눈에 보일 정도로 덜덜 흔들리는 손을 주먹으로 쥐고. 손바닥에 피가 맺힐 때까지 손톱을 박아넣는다.) 누구더러 보라고. (비가 오나 보다. 눈동자 속 회빛 하늘에도 물기가 맺혔다. 그럼 나는, 하고 묻는 그의 눈도 흐리다. 내가 저 맑은 눈에 비구름을 끌고 왔어.) ...... 너는 봤어?
CA
……. (손목을 타고 가느다란 핏줄기가 흐르는 동안 숨이 멎을 듯한 침묵이 이어졌다. 성에 낀 크라이오 체임버에 갇힌 채 시체처럼 잠들어 있던 그의 사진. 그 안에 담긴, 도저히 사람에게 행할 수 없는 수준의 피비린내 나는 기록들. 자아를 도려내고, 자존감을 깎아 끝끝내 인간성을 말살시키는 과정들. 굳이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대신 눈물이 고인 그의 눈꺼풀을 매만졌다.) 잘 들어. (비록 형편없이 갈라졌지만 여전히도 단호한 음성이었다.) 네가 감옥에 가기를 택한다면, 재판 과정에서 그 기록들이 세상에 공개될 수밖에 없어. ……그러니까 절대로, 무슨 일이 있어도 자수하면 안 돼. 차라리 내가 잠적하고 같이 도망치는 편이 나아.
CA
이건 명령이야.
barnes
(봤구나. 대답이 없어도 알 수 있다. 이게 수치심이구나. 나한테 그런 건 이제 없는 줄 알았는데. 누군가에게 알몸을 내보이는 것도 꿇는 것도 심지어 짖는 것도 아무렇지 않을 줄 알았는데. 꼿꼿하던 청년이 무너지고 인간 이하로 다루어지며 울부짖었던 순간들, 몸과 의식을 분리하고 또 심지어는 그 의식도 여러 갈래로 나누어 자신을 지워내는 과정을. 다른 누구도 아닌 스티브 로저스가 보았다고. 고개를 돌린다. 눈을 감고. 손이 잡히지 않았다면 이미 어디 하나는 난도질했을 테다. 울기 싫어 몇 번 웃음을 뱉어내고, 결국은 그 웃음이 울먹임으로 변하는 그 모든 순간에 그에게 붙들린 채였다. 명령이란 말에 고개 끄덕이는 대신 손목을 빼내려 힘을 싣는다.) ...... 모르겠어. (선택을 미룬다. 헐떡임을 다스리려 왼손으로 가슴께를 퍽퍽 치고.) 다른, 다른 얘기 해. 잊고 싶어. 잊게 해줘.
CA
……. 몰라도 돼. 알려고 하지 마. (질끈 감긴 속눈썹이 경련했다. 과호흡으로 인한 숨소리가 귓가에 어지럽게 울렸다.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 섬뜩한 웃음소리를 흘려보내다가 마침내 울음을 터뜨리는 그는, 흡사 숨을 들이켜고 내뱉는 법을 완전히 잊은 듯했다. 그대로 부스러져 사라져 버릴 것만 같은 공포에 휩싸인 채 고개를 깊숙이 묻고 그의 살결에서 전해지는 온기에 매달렸다. 으스러질 듯 꽉 껴안은 제 두 팔에는 비명이 서려 있었다. 제발, 제발 가지 마. 내가 또다시 널 놓치게 하지 마. 심장 박동이 서로의 가슴팍을 타고 고스란히 전해져, 누구의 것인지 모를 맥박이 고통스럽게 공명했다.) 괜찮아, 벅. 괜찮아, 괜찮아……. (떨리는 손을 들어 세차게 뛰는 심장 위를 짚었다. 대체 무슨 말을 해야, …….) 너 말이야. 여자 친구한테 선물할 곰 인형 하나도 제대로 못 따서 앉은 자리에서 차비까지 다 날린 주제에, ……저격수는 어떻게 한 거야.
barnes
(강인해야 할 두 몸뚱이는 그 심장 박동도 숨결도 모두 흐트러져 뒤엉킨 채 침대 위로 무너진다. 반즈의 몸은 고통에 젖은 로저스를 모른 체 하는 법을 몰랐고 두 팔이 그를 마주 껴안는다. 곧 숨이 넘어갈 듯 엉망이던 호흡의 결도 그의 등을 다독이며 조금씩 가라앉는다. 여전히 피부 아래 긁어내야 할 역겨움이 꿈틀거리는 듯 했지만. 답하는 음성에는 물기가 어렸다. 모순적이게도 이제껏 버석하게 갈라지던 것보다 더 인간의 소리인 듯 해서.) 전쟁에서 죽을 거란 걸 알고 있었어. 반즈 말이야. 그래도 널 몇 번이라도 더 보려면...... (조금이라도 오래 살아남으려 몸을 단련하고 고된 훈련을 견뎠다. 지친 눈꺼풀이 무겁게 내려앉는다.) 하나 약속해줘.
barnes
에셋에 대한 새로운 기록이 발견된대도 너는 보지 마.
CA
(그랬겠지. 자진해서 사지에 기어들어가 가치 없는 삶의 의미를 찾으려 애쓰던 자신과 달리, 그에겐 책임져야 할 가족이 있었으니까. 평범한 삶이 있었고, 여느 병사들과 마찬가지로 살고 싶었을 테니까. 빛바랜 시트 위에서 아무렇게나 뒤섞인 팔다리는 서로의 몸을 단단히 옭아매고 있었다. 어깨와 쇄골이 맞닿은 곳마다 후텁지근한 체온이 달라붙은 데다, 손끝으로 상대의 등과 팔을 아무렇게나 짚고 있는 모습이란. 정돈되지 않은 머리카락을 걷어내며 가려진 표정을 올려다보았다. 각자의 무게와 존재만을 감각하며 침묵 속에 잠긴 채로 가라앉은 목소리를 좇아 뺨을 매만졌다.) ……너에 대해 더 알고 싶어. 다른 사람이 더 잘 알도록 내버려두는 건 싫어, 벅. (정적인 뒤엉킴 속에서 옷깃을 잡아당겨 조금 더 밀착시킨 채로,) 너도 내 명령에 대답하지 않았잖아.
barnes
(몸이 기억하는 로저스의 체온은 남들보다 조금 높았다. 늘 미열에 시달렸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변했다지만 맞닿은 그의 살결은 그 때와 같이 손을 붙일 적마다 뜨끈한 온기가 제게 끈덕지게 옮겨붙었다. "추워," 그렇게 중얼거리며 그 품 속으로 사지를 웅크려 밀어넣는다.) ...... 내가 말해줄게. 필요하다면 시범도 보일 수 있어. (나름대로 농담이었는데. 방 안 공기는 띄워지기는 커녕 납작하게 눌어붙는다. 아무도 웃지 않아 의기소침해진 눈꼬리도 같이 떨어진다. 손바닥의 상처는 거의 아물어 간지럽기까지해 다시 득득 긁고.) ...... 자수는 안 할게. 붙잡히면...... 그건 그 때.
CA
알았어, 뭔가 생각나면 제일 먼저 나한테 말해. (거스러미가 인 손바닥에 강제로 깍지를 끼운 채, 등을 당겨 조금 더 깊이 끌어안았다. 열에 들떠서 헛소리나 주워섬길 때마다 푹 젖은 이마에 얹혔던 서늘한 손등. 그것과 비슷한, 어쩌면 조금 더 낮아졌을 체온을 빈틈없이 끌어안은 채 등을 다독였다.) 폐급 핸들러라고 생각하고 설명하든지. 이미 날 어느 정도는 그렇게 인식하는 것 같긴 한데. 필요하다면 기어오를 수도 있는. (딴엔 농담이었는데. 방 온도가 삽시간에 떨어지는 것을 온몸으로 실감하며 몸을 돌렸다. 눈꼬리를 접은 채로,) ……네 농담 수준이 나랑 같아졌네. 큰일이다.
barnes
...... 응. (입술 씹는 것도 손톱 세우는 것도 용납을 못하는지 또 붙잡혀버린 손을 보고 이젠 어이 없다는 눈빛을 보낸다. 이 정도는 괜찮잖아.) ...... 네가 왜 핸들러야. (소위 말하는 '폐급' 핸들러들도 꽤 있었다. 제 손에 죽어나가기도 했고, 냉동되었다 깨어나면 오간 데 없이 사라지기도. 접힌 눈꼬리를 왼손으로 더듬댄다. 저가 아직도 조그만 강아지인 줄 아는 대형견 같단 생각도 든다.) 내가 언제 기어올랐어. 다 들었잖아, 명령.
CA
괜찮고 안 괜찮고의 기준은 내가 정해. (금속성인데도 묘하게 부드럽고 매끄러운 감촉이 인상적이었다. 황당하다는 듯 크게 치뜬 눈동자가 어리숙하게 느껴져 그만 소리 내어 웃곤,) 농담이라니까. 네가 하나부터 열까지 다 말해준다길래, 그 정도 눈높이에 맞춰야 할 거란 소리였어. (손을 좇아 머리를 기울이다가 마저 등을 차분히 매만졌다. 시트에 옷이 비벼져 부스러지는 소리가 유독 선명하게 들렸다.) 난 네가 잠깐 잠들거나 한눈판다고 해서 교체되는 일 없어. 너와 끝까지 함께할 거야. 그게 가장 큰 차이점이겠네.
barnes
그럼 뭐가 괜찮은데. (목소리에 불퉁함이 스며든다. 크게 웃는 입 위로 손 텁 막아버리고픈 충동을 느끼며.) 너 은근슬쩍 내가 안 한 말 추가하지 마. '하나부터 열까지 다' 말한다고 한 적 없어. (기록에 없는 일들도 많을 거고. 말하느니 혀를 뽑아버리고픈 사실들도. 다소 침울해지기에 로저스의 입술을 한 번에 잡아 죽죽 당겼다 놓고. 잠드는 것을 꺼리는 이유를 정확하게 짚어낸 말엔 잠시 침묵한다.) 반즈도 그랬어. 자고 일어나면 네가 숨을 쉬지 않을까봐 걱정했던 것 같아.
CA
머리 긁거나 손톱 무는 것까진 봐 줄, 으븝. (오리 부리처럼 늘어난 채 입술을 움찔거리다가 손을 밀어냈다. 왼손으로 잡는 게 어딨어, 반칙이라고. 입 모양으로 툴툴거리다가,) ……. 결핵에 걸렸을 때. (어머니도 감염돼 돌아가시고, 홀로 침대에 누워 있었을 때. 그 자식은 안치소에서 풍기는 듯한 죽음의 냄새가 집 전체를 휘감고 있었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찾아왔다. 열꽃처럼 곰팡이가 핀 천장을 올려다보다가 느리게 입을 열었다.) 너까지 옮기 전에 나가라고 화냈는데, 넌 끝까지 버텼어. 들은 척도 안 하고 억지로 눕혔고, 물수건을 갈고 약을 챙겼는데… 그때도 그 소리를 했지. 우린 끝까지 함께할 거라고.
CA
……그 말을 너무 늦게 돌려준 것 같아, 너한테.
barnes
....... 응. (적절한 답을 찾지 못해 그렇게 나직한 긍정으로만 응한다. 그 말에 기뻐하는 것이 반즈인지 저인지 혹은 제가 그가 되어가는 것인지 알 수 없어서.) 나는...... 아무것도 약속할 수 없어. 네가 기다리면 네 친구가 돌아올런지. 그가 나를 대신한다 해서 말짱할 거란 장담도. (그렇게 눈을 감고.) 손톱 무는 버릇은 없거든. 반절 밖에 없는데. 뽑아버리면 불편하고. (나름의 기준이 있다는 듯. 어릴적 로저스가 간혹 입술로 손톱을 가져가면 잔소리했던 기억이 있다. "너 손이 얼마나 더러운 줄 알아? 세균이 얼마나....." 로 시작해 어쩌고 저쩌고.)
CA
(접촉과 체온을 달가워하는 건 확실해 보였다. 감긴 눈꺼풀 위로 조심스레 손바닥을 내렸다. 손바닥을 통해 전해지는 미세한 안구의 떨림과 속눈썹의 감촉이 간지러웠다. 눈동자의 둥근 굴곡이 불안하게 움직이다가 이내 고요하게 잦아드는 것을 느끼며,) 만약 걔가 죽었다면. 난 내 하나뿐인 친구를 평생 애도하면서 살아가겠지. 죽을 자리나 찾아보면서. 그러니까 네가 내 친구의 무덤인 셈이고. 만약 걔가 아직 살아 있는데, 내가 보기 싫어서 가만히 있는 거라면……. (저 역시도 한숨을 내쉬며 눈을 감곤,) 네가 몰라서 그러는데, 넌 원래 자주 토라졌어. 내가 세 번째로 입영 신청을 넣었을 때 열흘 동안 말도 안 걸었던 거 기억 나? 이번엔 며칠이나 가나 보자.
CA
그러니까 네가 누구든 상관 없어. 시간은 많고, 난 이제야 집에 돌아온 것처럼 느껴지거든.
barnes
반즈는 토라진 게 아니라...... (죽은 거라니까. 잠이 들었거나. 하지만 그가 속살대며 읊어오는 옛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것은 그닥 나쁘지 않아서. 가짜일지라도 그 평온함을 깨뜨리긴 싫었다. 그러니까 이 감정이 아쉬움인 건가. 그런데 제 입에서 꺼낼 수 있는 옛 이야기란 것들은 죄다...... "이봐, 반즈. 좀 일어나 봐. 사회성 좀 발휘하라고," 그렇게 다그치고 싶어진다. 여느 때와 같이 답은 들려오지 않았지만.)
barnes
...... 새 친구들 사귀었잖아. 신문 기사에서 읽었어. 어떤지 말해봐. (자신은 반즈가 아니기에 그의 새 동료들에 대한 질투심 같은 건 느끼지 않는다. 사실 반즈도 그런 생각을 하진 않을 것 같고...... 그냥. 이야기가 듣고 싶어서. 폐급 핸들러보단 라디오 취급이다.)
CA
그런 건 친구라고 안 불러. 공동 목표를 지닌 비즈니스 파트너나 동료라고 부르지. (나한테 친구는 너 한 명뿐이거든. 예나 지금이나. 주파수를 맞추듯 엷은 숨소리를 흘려보냈다. 이불자락을 넓게 펴 그의 가슴팍에 끌어올려 주곤,) 한 명은 하워드 스타크의 아들이야. 멋 부리기 좋아하고 어딘지 모르게 한심한 게 딱 하워드지. 얼굴도 비슷하고. 그리고 러시아 출신 스파이 한 명, 동종 업계에서 활동하는 활 쏘는 요원 한 명. 토르는 외계에서 왔다는데, 우주가 아니라 나보다 먼 과거에서 온 게 분명해. 그래서 그런지 그런대로 죽이 맞아. 그리고 헐크, 배너 박사. (뚱한 얼굴을 빤히 보다가 손끝을 딱, 튕겼다.) 이 사람은 너랑 좀 닮았어. 여러 면에서. 샘 윌슨은 이미 알 거고.
CA
……. 브록 럼로우도 꽤 유능했지. 말도 잘 듣고. 이젠 다 지난 이야기지만.
barnes
꽤 가까워 보였는데. (그리고 말하는 것을 들어보면 친한 게 맞는 것 같다. 칭찬일색이 아니라 어딘가 한 명씩 까고 있는 걸 보면.) 빨간 머리. 아주 어렸을 때 본 적이 있어. 그 땐 머리를 땋고 있었는데. (기억한다. 죽이지 않으려고 어디를 겨냥해 쏘았는지까지도. 몇 안 되는 임무 실패였고 처벌은 그 어느 때보다도 극심했다.) ...... 통제불능인 점에서? (화가 나면 괴물이 된다는 점에선 어느 정도 비슷하겠지만. "박사라며," 하며 중얼거린다. 나 같은 머저리하고 누구를 비교하나.)
barnes
(아야. 콧잔등 찌풀. 몸을 슬쩍 일으킨다.) 브록을 알아? 아, 쉴드에서 일했다고 했나...... (뒤죽박죽으로 어그러진 정보를 머릿속으로 정리하며.) ...... 괜찮았어. 걘 날 아프게 하지 않았거든.
CA
식사도 따로 하는 사이야. 하울링 코만도스랑은 좀 달라. 좀 더……. 서로 완전히 믿을 수 없는 느낌. 그렇기에 존중은 하는, 그런 관계. 배너 박사는 냉소적이고, 은근히 비관적이고, 예민하거든. 화가 좀 많다는 점도. 그렇지만 머리는 비상하게 뛰어나다는 점도. (일어나게? 빤히 올려다보다가 냉장고를 가리켰다. '아침에 빵 사 뒀어.') 럼로우도 아나 보네, 역시나. 시선이 묘하게 건방진 건 마음에 들더라. (캡틴 아메리카에 대한 선망과 동경은 눈곱만큼도 담겨있지 않은, 어딘가 불만에 찬 눈빛. 그 불손한 시선이 마음에 들었던 기억은 선명했다.) 엘리베이터에서 전기봉을 꼬나들고 죽자고 덤볐던 건 좀 웃겼지. 물량 공세로는 어떻게든 될 줄 알았나 봐.
barnes
지금...... 내가 예민하고 화 많은 놈이라고 돌려까는 거야? (빵? 나가는 소리도 듣지 못했는데 언제. 냉장고 열어보면 속에 무리 가지 않도록 부드러워 보이는 빵과 음료수가 채워져 있었다. 건너뛴 채 물로 손을 뻗어 까끌한 목을 축이고. "배 안 고파," 그렇게 말하며 고개 내젓는다.) 순한 걸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명령조로 떨어지는 어투부터 따르지 않으면 힘 주어 각이 두드러지는 턱까지. 마음에 들지 않는 행위엔 손부터 뻗어 제압하는 것도...... 고개가 기울어진다. 둘이 그렇고 그런 사이였나? 회빛 눈이 굴러가다 어깨 으쓱인다.)
CA
(그의 불평불만은 늘 그렇듯 가볍게 흘려듣다가, 어쩐지 알 만 하다는 듯한 눈빛에 대번에 미간이 좁혀진다. 저 눈짓은 익숙하다. '스티브, 쟨 네가 마음에 든대. 가서 잘 해봐.' 같은 헛소릴 할 때 짓는 흐뭇한 표정.) 무슨 이상한 생각을 하는 거야. 그냥, 날 다저스 로고나 머리 둘 달린 독수리쯤으로 보지 않아서 마음이 편했어. 21세기에선 원숭이 취급이 기본이다 보니. (저 역시도 일어서서 냉장고를 열었다. 뿌옇게 피어오른 냉기 속에 손을 넣어 식빵 두어 조각을 꺼내곤 결을 따라 가늘게 찢었다.) 하루 종일 아무것도 안 먹었어, 너. 사람은 못해도 두 끼는 먹어야 한다고. (입가에 손을 대곤,) 아.
barnes
아무 생각 안 했어. 걔 잘생겼잖아. (어쩐지 들킨 듯한 얼굴이 되어 고개 돌린다. 서커스 원숭이처럼 외발 자전거에 올라가 있는 로저스를 떠올리고 혼자 웃는 것도 숨기고.) ...... 배 안 고파. 안 먹어도 잘 움직여. 너도 비슷하잖아. (혈청으로 강화된 몸은 피로를 해소하기 위해서 타인보다 몇 배의 음식을 요했지만 동시에 쓰러지거나 휘청거리도록 두진 않았다. 그것은 잠도 마찬가지였고. 뭔가를 씹어 넘겨서 속을 채우는 행위에 언제부터 거부감을 느끼게 된 건진 모르겠으나...... 빵을 가져다 입에 들이미는 것에도 고집스럽게 입술 꾹 닫아둔 채 바라본다. 음식을 거부하는 행위임과 동시에...... '명령'을 거부하는 것에 그가 어떻게 반응할지에 대한 나름의 시험이었다. 그의 호의를 신뢰하지만 동시에 자신이 길들여진 과정도 믿었기에.)
CA
못되게 생겼어. (느닷없이 허리를 숙이고 숨을 터뜨리는 꼴을 기가 막히다는 듯이 흘겨보다가,) 너보다 잘생기지도 않았고. (연비가 나쁜 편은 아니었지만, 궐식이 계속되면 그만큼 이후에 채워야 할 열량이 많아진다. 위장 기능이 심각한 수준으로 약화됐을 그가 그만한 부담을 견딜 수 있을지도 확실하지 않고. 반항기마저 느껴지는 단호한 시선에 지지 않고 눈을 맞춘 채, 단 일 초도 눈꺼풀을 깜빡이지 않고 유치한 눈싸움이나 이어가다가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미리 말해두는데, 네가 먼저 먹기 전까진 나도 안 먹어.
barnes
(요는 로저스가 저를 위해 행하는 것 모두 조금은 괴롭힘처럼 느껴진다는 것이었다. 도와준다더니 저 손에 칼을 꽂아넣질 않나. 머리에 총을 겨눠 심장이 떨어지게 했고. 지금도. "나 안 먹는 거랑 너랑 무슨 상관인데," 그렇게 노려보아도 미동도 없는 사내는 화가 나게끔 했다. 이상하게도 모든 감정이 분노인 것으로 결론이 나면 그가 저더러 헐크를 닮았다 말한 것을 진지하게 고려하게 된다. 한숨을 내쉬고 입을 벌린다.) ...... 조금만. 많이는 안 먹어. 첫날 토했거든. (도망 다니던 와중에 거지로 착각했는지 음식을 나누어 받은 일이 있었다. 모두 남김 없이 게워냈고.)
CA
무리하지 마. 나도 처음엔 소화 능력이 심하게 떨어져 있었어. 제대로 된 음식을 입에 댄 지는 얼마 안 됐을 거 아니야. (네가 내 속을 긁어내는 건 괴롭히는 축에도 안 들어간다, 이거야? 가느다랗게 찢은 조각을 입에 밀어 넣고, 볼을 움직여 충분히 이로 씹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손을 내렸다. 열받은 게 확실해 보이는 뾰족한 시선에 대고 지지 않고 빙그레 웃는 건 덤이고. 이런 식으로 약올리다 보면, 그가 충동적으로 덤벼들어 무방비한 자신을 끝장낼 수도 있지 않을까? 그건 그것대로 괜찮은 결말인 것처럼 느껴졌다. 옆에 앉아 다리를 모으고 있다가,) ……너 술은 마셔 봤어? (취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냐는 확인에 가까웠다.)
barnes
(멍청하게 스스로 얼음에 처박혔기 때문에 말이지. 입 밖으로 냈다간 또 반즈를 찾으러 가지 않았단 사실에 자책할 게 분명하니 삼키고. 화가 나는 건 그저 쉽게 목숨을 포기하는 그 빌어먹을 습관에였다. 빵쪼가리 입 안에 들어오면 퍼슬퍼슬한 걸 느릿하게 씹는다. 이건 무슨 맛이지. 한 조각 먹고서 이제 싫다며 손을 내젓는다. 그 새 손톱 자국 하나 없이 완벽하게 아문 손바닥을 그에게 내보이며. 봐, 어차피 다 나을 건데. 곁에 앉은 그의 입가에 미소가 어리는 것이 보인다. 이제 저 표정을 읽을 수 있게 됐다. 모르긴 몰라도 제가 싫어할 생각을 하고 있단 의미였다. 반즈와 제가 싫어하는 것이 같아졌음을 깨닫는다.) ...... 응. (마셨다기보다 입에 들이부어졌단 뜻에 가깝겠다. 알코올이나 약물로 반즈의 의식을 어지럽힐 수 없단 것을 하이드라는 제일 먼저 확인했으니까.) ...... 여기 얼마나 있을 거야? 찾으러 갈 게 있는데.
CA
다 낫는다고 해서 통각이 없는 것도 아니잖아. 하나 남은 손마저 함부로 다룰 거야? (남은 빵을 동그랗게 구겨서 한입에 욱여넣곤 잇새로 으끄러뜨렸다. 맛은 적당했지만, 특별할 것도 없는 무난한 식감. 전투식량보단 낫다는 감상 정도로 식사를 마무리하곤 그의 대답을 곱씹으며 미간을 서서히 조여 올렸다. 고문으로 가한 상해는 금세 회복되고, 정신은 약물로 쉽사리 망가뜨릴 수 없다. 어스킨 박사의 혈청과 완벽히 같은 성능은 아닐지라도, 엇비슷한 수준은 보일 테니까. 그런 몸뚱이를 기어코 복종시켰다면, 인격을 완전히 거세하고 병기로서 작동하도록 만들었다면. 대체 무슨 짓을 해야…….) 뭔데, 갈 거면 같이 가. 한동안은 나도 한가할 예정이라. (벽 구석에 비스듬히 기대 둔 방패를 곁눈질하다가,) 당장 출발해도 안 놀라.
barnes
통각이 중요한 거야, 바보야. (하이드라로부터 벗어나 숨 돌릴 여유를 찾자 괴리에 빠진 의식이 스스로를 뒤틀기 시작했다. 멀쩡한 몸과 달리 망가지고 해어진 정신의 고통이 신체로도 이어져 아무런 의상이 없는데도 어지럼증과 구토 증세에 괴로워하곤 했다. 그 때 찾은 방법이었다. 그 혼돈을 파고드는 방법. 예리한 날이 살갗에 스치는 그 감각을 이용하는 것. 게다가 스스로 몸을 해치는 것이 부여하는 만족감도 무시할 수 없었다.) ...... 그런 것 아냐. (이 호텔 방에 온전히 제 소유인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심지어는 어깨에 달린 왼팔도 자신의 것이 아니었고. 그런데......) 가방을 찾으러 가야 돼.
CA
……. (외상이 없다고 해서 내면도 정상적이라는 법은 없으니까. 죄책감과 자기혐오, 육체와 정신 간의 괴리를 통증으로 봉합하려는 심리라면 이해 못 할 것도 없지만. 실드에 소속되어있는 동안 무언가를 기대하듯 위기 상황에 거리낌없이 자신을 내던진 것과 비슷하거나, 조금 더 심각한 상황이겠지. 짐에 든 내용물이 별거 아니라면 새로 구매하는 것도 방법일 것이다. 그러나 잃어버렸다는 것. 설령 타인이 보기엔 별것 아닌 것처럼 보여도 한때는 자신의 소유였던 무언가를 영영 놓치고 말았을 때의 상실감과 허탈함은 누구보다도 잘 알았으므로. 다정하게 눈을 맞추곤,) 알았어. 어디에 떨어뜨렸는데?
barnes
(눈동자가 서로를 향하면 푸른색이 따뜻하게 빛나는 것에 새삼 놀라 뒤로 한 발 물러난다. 꼭 데일 것만 같아서. 가방은 잠을 청하던 폐공장에 숨겨 두었다. 든 것이라곤 노트 몇 권 뿐이지만. 신문에서 발견한 스티브 로저스의 사진을 찢어 붙인 페이지. 간간히 음식을 먹으면 맛을 가늠해보며 끄적였던 장. 러시아어와 영어가 어지럽게 얽혀 알아보기 힘든 글자들이 찍혀 있는 종이 묶음에 불과하지만......) 혼자 다녀와도 되는데. (도망치려는 의도는 없었다. 이 멍청이는 분명 쫓아올 테니까. 그저 지내던 곳의 열악한 환경을 굳이 보여주고 싶진 않았기에.)
CA
(물러서는 순간 저도 모르게 팔을 뻗어 붙잡아 당겼다. 단 한 순간이라도 간격이 생기는 것을 견딜 수 없다는 듯. 저 역시도 그 못지않게 사람과의 대화가 그리웠는지도. 그러니까 자신을 이방인이자 상징의 영역에 가둬둔 채 진열장 바깥에서 말을 걸던 이들이 아니라, 아무것도 모르면서 영웅이라 칭송하는 관객이 아니라, 멍청한 꼬맹이쯤으로 취급하는 사람이 절실했는지도 모르고. 설혹 버키 반즈가 아니라, 한때 무기를 맞대며 죽기 직전까지 다투던 암살자라고 해도.) 같이 가. 실드도, 하이드라도 무너진 마당에. 널 노리는 사람이 한둘이 아닐 거야. (혼자 있고 싶지 않다는 절박함에 의수를 조금 더 세게 움켜쥐곤,) 밖에서 대기하라고 하면 그렇게 할게.
barnes
(물러난 건 겨우 한 발임에도 꼭 아주 멀어진 것처럼 당겨오는 것에 눈 크게 뜨인다. 회빛 눈동자가 굴러다닌다. 하이드라는 이 눈을 싫어했다. 제아무리 감정을 지워내고 자아를 삭제해도 무언가 보인다는 것처럼. 매번 가려서 내보내던 것도 그 때문이었으려나.) ...... 알았어. (의수를 움켜쥔 그의 손목을 잡아 부드럽게 떼어낸다. 이 몸이 로저스를 달래는 법을 이미 알고 있음을 깨달을 때마다 이상한 기분이 되었다. "옷 갈아입을게," 그렇게 중얼거리며 엊그제 산 쇼핑백을 젖힌다. 뭘 이렇게 많이 샀지. 혹여 누군가에게 보일까 두려워하던 와중에 이것저것 담았던 모양이다. 계속 눈길이 갔던 파란 스웨터를 꺼내고.) 너 이거 마음에 안 들어했잖아.
CA
(처음 바이저를 쓰고 나타났을 때도 그렇게 생각했다. '고글 벗는 게 더 잘생겼을 것 같은데.' 정체를 드러내기 전에도 둥근 턱선과 부드러운 곡선을 지닌 콧날, 창백한 피부와 체형이 지나치게 익숙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허락이 떨어지자, 그제야 수긍한 듯 몸을 돌리곤 재킷에 팔을 꿰었다. 멀지 않은 곳에 오토바이를 주차해 두긴 했는데. 그가 스웨터에 머리를 넣는 동안 창가에 붙어 바깥을 내려다보았다. 박모가 완전히 걷히고, 새벽 특유의 푸르스름하고 어두운 기운이 장막처럼 내려앉아 있었다. 눈에 띄는 인물은 없었다.) 좀 더 화사한 걸 사주고 싶었거든. 창백해 보여서. 그래도 네가 고른 거니까, 다음에도 네 취향대로 골라. (피차 전등 스위치에는 손도 대지 않았기에, 카드키를 뽑아도 방은 변함없이 눅눅한 어둠 속에 잠겨 있었다.) 여기서 많이 멀어?
barnes
그런 것 없어. 따뜻해 보여서 본 거야. (늘 추우니까. 피부 위에 옷감 몇 겹을 얹어도 떨쳐낼 수 없는 서늘함에 이제는 익숙해졌지만. 반즈는 겨울을 좋아했던가. "아니. 스티브는 해마다 겨울에 호되게 앓았거든." 물음에 답이 돌아온다.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고.) ...... 아니. (빛이 없어도 두 쌍의 눈은 어둠 속의 서로를 지나치게 선명하게 볼 수 있었다. 제가 입은 스웨터 빛깔은 그의 눈동자 색보다 짙고 채도가 낮았다. "파란색을 좋아했어?" 그 물음엔 "응, 그 애 눈이 생각나서," 하고 반즈는 답한다. 취향이 생기는 순간이다. 문을 열고 복도를 지나 음악이 흐르는 엘리베이터 속에 거구의 두 사내가 몸을 끼워넣는다.)
CA
(가난 속에서 취향은 생존을 앞설 수 없었으므로, 버키나 저나 주어진 대로 입고 지내는 것에 익숙했다. 지급된 군복조차도 제 개성에 맞게 변형해 맵시 있게 입던 그와 달리, 자신은 뭘 입든 남의 옷을 빌려 입은 듯 헐렁했고, 품에 맞지 않았고, 초라했으니까. 그나마 현대에 들어와 당시의 어른들이 입던 옷을 비슷하게 모방해 봤지만 촌스럽다는 소리나 들었고. 기자회견 때 토니 스타크가 입혀 준 톰포드가 좋은 소리는 많이 들었지만, 정작 자신이 갑갑해서 영……. 좁은 공간에 거의 밀착하다시피 선 채로 불안하게 서 있는 그의 어깨나 허리를 눈대중으로 가늠했다.) 나중에 정장이라도 입어 봐. (그가 뭐라 대답하기 전에 문이 열렸다. 키를 카운터에 맡기곤 따라오라고 눈짓했다.) 너한텐 잘 어울리겠다. 오토바이 세워 뒀어.
barnes
...... (어렴풋한 기억 속의 버키 반즈는 늘 홑겹을 입고 있었다. 곁의 로저스에게 웃옷을 덮어 준 것 같은 그림도 꽤 보였고. "하루는 일당이 깎여서 약값이 터무니없이 부족했어. 그 때 입고 있던 외투를 벗어서 팔았는데......" 머릿속 버키 반즈의 음성이 조금씩 커진다. "나한테 말하지 말고 직접 나와서 얘기하라니까." 혹여 직접 입 밖으로 중얼거리게 될까봐 아랫입술을 지근댄다.) 네 말대로 법정에 설 것 아니면 그런 걸 입을 일이 어디 있어. ...... 가까운데. (호텔에서 십 분 채 안 되는 거리의 허름한 공장이었으니까. 성큼성큼 걸어가는 그의 보폭을 좇아 자켓 소매를 끌어당긴다.) ...... 걸어가자.
CA
그 옷 잘 어울렸잖아. 내가 살 때 돈 보태줬던 거 기억 안 나? (초점이 흐릿해졌다가 돌아오는 눈동자를 읽다가 뇌리를 훤히 꿰듯 가볍게 대꾸했다. 어쩐지 그날 이후로 안 입고 다니더라. 공연히 정강이만 가볍게 걷어차곤 그가 끌고 가는 방향대로 발걸음을 옮겼다. 리프스카니 지구까진 콘셉트 숍과 분수, 좁은 돌담길과 석조 건물이 늘어진 세련된 거리였지만, 이쪽은 부쿠레슈티 외곽이었다. 관리가 덜 되거나 천장이 무너져 내린 주택이 대부분이었다. 칠이 벗겨진 그래비티와 공원을 벗어나 두서없이 자라난 녹지. 투박한 낭만이 지나간 사회주의의 역사 한가운데 응고된 듯한 풍경. 브루클린과는 또 다른 오래된 벽돌 아파트를 지나며 이따금 뒤를 돌아보았다.) 아직까지 미행은 없는 것 같은데……. 그간 용케도 잘 피해 다녔네. 나까지 포함해서.
barnes
자꾸 뒤 돌아보지 마. (부산스레 몸을 움직일 수록 눈에 띄는 법이다. 그렇게 말하는 자신의 눈동자도 바쁘게 굴러가는 중이었지만. 이제껏 로저스의 등을 보고 쫓아가던 것과 달리 최대한 그와 보폭을 맞추어 나란히 걷는다. 어깨를 가까이 붙여 어색함을 가리고.) 사람들 사이에 섞여야 해. 너는...... (지나치게 '미국인'처럼 생긴 그를 보고 곤란하단 얼굴을 한다. 얼굴이 알려진 것도 문제지만 그는 너무나 눈에 띄었다. 잘 빠진 낯짝도 커다란 몸도. 사내 둘이 관광을 올 만한 지역도 아닌 데다 골목 안쪽으로 걸음을 틀면 수상쩍어 보일 게 뻔했다.)
CA
여태 잘만 다녔어. 그 티타늄 의수만큼 눈에 띄진 않아. 이러니까 나타샤랑 도망 다닐 때 생각나네. (따지고 보면 복장도 그때와 비슷했다. 러닝슈즈에 청바지. 옷 안쪽에 슈트를 겹쳐 입고 있긴 했지만. CCTV 몇 개를 제외하면 눈에 띄는 위험은 없어 보이는데. 아무렇게나 점퍼와 겹쳐 입은 후드를 머리에 눌러쓰곤,) 너도 만만치 않게 눈에 띄는 얼굴이거든. 이러면 돼?
barnes
...... 아니. (그래도 어쩌겠나. 후드 아래로 흐트러져 삐져나온 금발을 밀어넣어 준다. 먼저 손 뻗는 일이 잦아졌음을 깨달으면 타인의 온기에 쉽게 기대어 안주하는 자신을 타박하게 된다. '이러니 그들도 널 쉽게 길들인 것 아니냐고,' 언제 사라질지 모를 따스함에 익숙해지려는 스스로를 붙들어 둔다. 불그스름해진 낯을 가리려 고개 돌리고. 골목 안쪽으로 걸음을 틀면 지내던 허름한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저기야. (철제로 덧대어진 부분은 이미 녹이 잔뜩 슬어 붉게 번져 있었고 군데군데 깨진 창문 안쪽은 짙은 검은색으로 칠해진. 사람을 거부하는 공간에 제 발로 들어서 그 일부로 녹아들었던 자신을 떠올리고.)
CA
(제 머리를 헝클어뜨리던 기억 속의 손길과 놀랍도록 흡사해서, 서늘한 손끝이 스치고 지나간 뺨 위로 가만히 손을 댔다. 이러는데 어떻게 버키 반즈와 다른 인물로 보라는 거야. 겹겹이 쌓인 붉은 녹이 폐공장 외벽에 상처에 내려앉은 딱지처럼 흉하게 굳어져 있었다. 제 역할을 할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문고리에 손을 대자 차갑고도 거친 녹가루가 들러붙었다.) ……왜 혼자 다녀오겠다고 했는지 알 만하네. (날카로운 유리 파편 몇 조각이 이빨처럼 위태롭게 매달려 있는 창문틀 너머, 공장 내부의 공허한 폐허가 시야에 들어왔다. 이런 곳에서 살았단 말이지.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모른 채로, 웅크리고 누워서 악몽에 시달리면서……. 그의 불안을 알아차린 듯, 손을 내려 의수를 단단히 맞잡고는,) 같이 들어가, 벅.
barnes
...... (밖에서 기다리라면 기다리겠다고, 그렇게 말했었지. 혼자 다녀오겠다고. 여기 있으라고, 그렇게 말해야 하는데. 이런 건 굳이 보여줄 필요가 없으니까. 하지만 몇 번 입술을 달싹이다 맞잡은 손을 뿌리치지 못하고 같이 안으로 들어선다. 안의 축축한 공기에 퀴퀴한 냄새가 떠다니며 코를 찌르고.) ...... 제대로 된 곳으로 옮기려고 했어. (왜 변명을 하고 있는지. 오래 머무를 생각 없이 자리 잡았던 건물에 생각보다 애착을 가지게 되었더랬다. 자신과 닮았다는 생각에. 망가지고 버려진, 쓰임을 다한 건물에 제가 들어가 있는 것도 퍽 어울렸고, 편했으니까. 어쩌면 살에 칼을 대는 것 만큼이나 도망에 가까운 행위였겠지. 한 층 위로 향한다. 쓰던 담요야 쥐 득시글댈 게 뻔하니 쳐다도 보지 않고 이전에는 소방용품 넣어두는 곳이었을 벽면의 철제 문을 열고. "아." 조금 높아진 음성은 반가움을 띤다. 오히려 로저스와 마주쳤을 때보다도 밝은.) 있다.
CA
(곰팡이와 먼지가 엉겨 붙어 검게 보이는 벽면 하며, 계단을 밟자, 아귀가 맞지 않는 나무판자가 비틀려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바닥엔 언제부터 고여 있었는지 알 수 없는 물과 휘발유가 고여 걸을 때마다 질척거렸고. 숨만 쉬어도 세균이 들러붙는 듯한 감각이 일어 손을 입가에 가져다 댔다.) 엉망진창이었잖아. 아무리 도망 다니는 처지라 해도 그렇지. ……. (폐차 몇 대와 공구가 발에 챘다. 본래 용도는 주차장이거나 자동차 공장이거나, 정비소일지도 모르고. 그가 들고 있는 노트를 어깨너머로 예의주시하다가 손을 뻗어 표지를 넘겼다.) 그게 그렇게 반갑고 좋아? (다이어리 겸 스크랩북인가? 끝이 약간 너덜거리는 사진을 발견하자 그의 옆모습을 흘긋 보곤,) 내 얼굴이잖아.
CA
……그냥 와서 물어보면 사진 백 장도 더 줬을 텐데. 설명도 곁들여서.
barnes
...... 지낼 만 했는데. (잠시라지만 호텔 방과는 달리 이 장소는 온전히 제 것이었고. 못마땅하단 어투에는 조금 뾰족하게 답한다. 가방 속의 노트 서너 권 중 하나를 꺼내면 그 새 눅눅한 공기에 종잇장이 울기 시작한 모양새였다. 눈썹을 축 늘어뜨리며 표지를 쓰다듬고. 노트를 펼쳐 너덜거리는 사진 끝을 매끄럽게 접어 깔끔하게 갈무리해 넣는다. 흑백의 바랜 사진 속 인상을 조금 찌푸리며 렌즈를 응시하는 로저스. 자신의 몸에 들였던 것의 배는 되는 정성으로 노트를 다루다 고개를 든다.) ...... 네가 누군지 궁금했거든. 끝까지 가겠다고...... (그런데 저는 길이 어디인지조차 몰랐으니까. 오래된 신문 기사에서 스크랩한 사진들과 박물관 팜플렛에서 그 역사를 좇았다. 눈 앞의 로저스보다 노트 속 로저스를 '스티브'라고 생각했던 시간이 아직은 더 길다. 노트를 품에 안고.) ...... 읽어보고 싶어?
CA
(괜히 손부터 나갔나. 멋쩍게 손을 거두고는 먼지가 심하게 쌓인 바닥에 아무렇게나 체중을 실어 뒤로 기댔다.) 네게 소중한 거잖아. 아니야? 그렇다면 네가 보여주고 싶을 때 보여주는 게 맞지. (쥐가 돌아다니는 듯한 요란한 소리에 잠시 주위를 돌아보다가 맞은편에 약간 위축된 듯한 그를 응시했다.) 네가 살아온 환경을 탓하는 게 아니야. 그냥, ……속상해서 그래. 더 좋은 곳에서, 더 멋진 삶을 살 수 있는 사람이니까. 나한테 넌 언제나 그런 친구였으니까. (아예 반쯤 찢어지다시피 한 담요 귀퉁이를 끌어다 바닥에 주저앉았다. 신세 져서 나쁠 건 없지. 쫓아다닐 적엔 하수구 근처에서 잠복한 적도 있었는데, 새삼.) 엉터리에, 보기 좋게 끼워 맞춘 기록이긴 해도, 어땠는데? 거기에 적혀 있던 버키 반즈나 나는.
barnes
반즈에 대한 이야기는 별로 없었어. 네가 말했잖아, 그의 이야기는 자주 하지 않았다고. (노트 속 로저스의 사진 바로 옆에 팔랑거리며 웃음 짓던 반즈가 함께 찍혀 있었다. 그 모습이 생소해 잘라냈지만. 털썩 주저앉은 그를 보며 눈을 찌푸리고.) 그거 더러워. 일어나. ...... 유일한 전사자라는 설명 뿐이었어. 어렸을 때부터 친했다는 말이랑. (그를 만났을 때 "반즈는 죽었어," 하고 확신에 차 말했던 것이 꼭 오래 전 일 같다. 이제는 그 말이 사실인지도 알 수 없고. 의식 속 반즈는 로저스를 마주하고 싶지 않아했지만 죽었다고 말하기엔 그 음성이 선명했으니까. 표지를 넘겨 노트 첫 장을 열면 꽤 열심히 적은 로저스에 대한 기록이 드러난다. '7월 4일 생,' 이란 기본적 정보부터 '무모한,' 같은 감상까지. 어딜 보아도 궁금해하는 것 같은 낯에 읽어 보라며 넘겨준다.)
CA
네가 덮었던 거고. 참호 아래에서 부대껴 지낼 때랑 비슷하지, 뭐. ('전 하울링 코만도스 리더, 현 어벤저스 리더. 슈퍼 솔저 혈청 실험에 최초로 성공한 인물, 에이브러햄 어스킨 사망 이후, 유일무이한 완성형 슈퍼 솔저로서…….' 박물관의 설명을 그대로 옮겨 적은 것도 있었다. 아직 어벤져스가 결성되기 전, 홀로 지하실에서 샌드백을 터뜨리거나, 추억들이 전부 밀려난 도시를 유령처럼 떠돌거나, 종전 이후의 세상에 대해 찾아보았다. 종전을 축하하는 사람들, 그 모든 기쁨과, 하늘을 수놓은 색종이들……. 보자마자 노트북 화면을 껐다. 그리고 다시는 찾아보지 않았다.) 내가 무모한 게 아니야. 중요한 일에 목숨을 걸지 않는 경우가 이상한 거지. (아무렇게나 엎드리다시피 몸을 바닥에 대곤 그를 향해 손짓해 보였다.) 여기서 잠깐 쉴래. 창문이 훤히 뚫려 있어서 일출 보기엔 딱 좋네. 너도 와서 같이 봐. (잠시 고민하다가,) '벅.'
barnes
("내가 덮었던 거니까 더럽다고," 그렇게 말했다간 또 저 눈썹을 늘어뜨리며 설득하려 들겠지. 아직 저 스스로 문장 하나 만들어내기도 어렵던 시절 로저스를 '공부'하는 것은 제 언어를 구성하는 틀이 되기도 했다.) ...... 보통은 목숨이 가장 중요하지. (예전에도 그랬다. 총구를 머리에 들이밀면 아내와 아이들이 자는 곳도 술술 부는 놈들이 태반이었다. 또는 살아돌아갈 이유가 명확했거나. "한 번만 더 보게 해주세요," 하고 빌던 이들. 사랑하는 연인의 이름을 계속 외면 그걸 저도 잊지 못하게 됐고. 핸들러에게 타겟이 자꾸만 부르던 "플로렌스"는 누구냐며 물었다가 의자에 앉혀진 이후엔 귀도 닫힌 체 했으며......) 새가 날아들기도 해. (그렇게 하나는 엎드린 채, 그리고 저는 엉거주춤 곁에 앉아선.) ...... 왜?
CA
그래서였나 봐, 다른 사람들과 여태 못 어울렸던 건. 단순히 과거에서 왔기 때문만은 아니었던 거겠지. (예전에도, 지금도. 목숨은 담보나 판돈에 지나지 않았다. 무언가 의미 있는 일을 해내고 사회에 이바지할 수 있다면 몇 년 더 살고 못 살고는 중요치 않다고. 버키는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질색했다. 가능하다면 그 부분을 제 뇌에서 도려내고 싶어 할 정도로 싫어했다. 그가 왜 그렇게까지 죽음을 가볍게 여기는 것을 두려워하면서도 싫어했는지는 친구가 허무하게 죽고 나서야 비로소 알 수 있었다. 한 번도 혼자 남겨질 거란 생각을 해보지 못한 자신은 그렇게 홀로 죗값을 치렀다. 소맷자락을 가만히 당겨보다가 의수에 머리를 기댄 채, 해가 지평선 위로 치솟는 광경을 지켜보다가,) 난 저걸 보는 게 참 싫었는데. (또다시 아무런 의미 없이 시간이 흘러갈 때, 자신의 생존에 공허함을 느끼며 가닿을 곳 없는 끝을 가늠할 때를 떠올리다가 눈을 감았다.) 너랑 보는 건 나쁘지 않네. 잠시만 기대고 있어도 돼?
barnes
...... 나는 저걸 오랜만에 봤어. 늘 어두웠거든. (고개를 끄덕이거나 긍정의 대답을 내놓는 대신이었다. 딱딱할 텐데. 의수와 그의 머리통 사이로 오른손을 집어넣어 받쳐 주면서. 창백한 낯에 밝은 햇살이 와닿는다.) 눈이 부셨던 기억이 나. 세상이 노랗게 물드는데 그게 네 머리 색과 닮아서...... 가까이 가면 안 된다고 생각했지. (밝고 깨끗한 것에 얼룩을 묻히는 것 같아서. 지금도 봐, 이 곳과는 어울리지 않는 네가 더러운 담요에 엎드려 깨진 창을 통해 세상을 보고 있잖아.)
CA
……난 가까이 가면 안 되는 사람이야? (혼잣말처럼 뇌까렸다. 여기 편하네, 생각보다. 그와 어딘지 모르게 닮았고. 비바람과 세월에 시달려 낡고 허물어져 있는 데도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잖아. 오련한 그림자가 진 옆얼굴을 응시하다 온기를 머금은 손바닥에 완전히 머리를 기댔다. 그 모든 일을 겪고도 여전히 널 완전히 잃지 않아서. 어떻게든 살아남아 너 자신을 되찾으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던 건지도 모르겠다.) 좋네, 네가 잘 보여서. ……. 조금만 더 있다가 들어가자. (찌르는 듯한 광선에 가볍게 눈가를 찌푸리곤,) 강에서 건져내자마자 바로 박물관으로 쳐들어간 거야? 내가 거짓말했을까 봐?
barnes
...... 너보단 내가. 넌 밝잖아. (고개 숙여 그 낯 위로 그림자 지게끔. 아무렇게나 자란 머리칼이 이마 앞으로 쏟아진다.) 바로는 아니야. 한동안...... (아팠거든. 흐려지는 음성. 두어 걸음만 걸어도 머리가 깨질 것 같아 몸을 숨기고 며칠 웅크려 있었다. 상처 입은 짐승처럼.) 이 얼굴이 누구 건지 궁금했어. (박물관에 박힌 반즈 병장의 얼굴. 들여다보면 꼭 그 눈이 시선을 되돌려주는 것 같았는데. 로저스의 과거 체형을 복원해둔 곳 앞에 한참을 머물렀다. 왜소한 인영이 뻥 뚫려 전시된 모양에 가슴이 시큰거렸던 기억도. 이유는 몰랐으나......) 다들 거짓말을 했으니까. 나는 인간이 아니고, 인간은 다들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했어.
CA
(차광막이 생기자, 그제야 찡그린 눈을 뜨고 가느다랗게 응시했다. 역광이 드리워졌음에도 빛 따위보다 몇 배는 더 아름다운데, 네가. 손을 뻗어 뺨을 사붓하게 어루만졌다.) ……인간이 아닌 존재에게도 입이 있다면, 인간 같은 건 되고 싶지 않다고 비명을 지르겠지. (밝다는 말에는 코웃음을 쳤다. 머리꼭지가 좀 노랗다고 해서 음침함이 사라지는 건 아니거든, 버키. 아 참. 이미 죽었지.) 시저를 이해하기 위해 시저가 될 필요는 없듯, 난 네가 꼭 인간이 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 애초에 나만 해도 당시의 기준으로는 인간과 거리가 먼 존재인데, 새삼. (불과 며칠 전의 기억이 한 세기 전의 기록으로 치환된 자신과는 또 다른 충격이었겠지. 갈색으로 빛나는 머리칼을 손끝으로 꼬았다.) 그러니까 너한테 거짓말은 안 할 거란 소리야, 벅.
barnes
(가슬한 뺨에 굳은살 박힌 손바닥이 와닿는다. 부드럽지 않은 살결끼리 만나서. 그래도 그 온기에 기대게 된다. 피부가 기억하는 엷은 예술가의 손이 아닌 두툼한 군인의 손이라지만 따스함은 엇비슷해서.) 그래. 인간이 아니고 싶었어. (고통을 고통이라 해석하지 못했으니 모든 것이 괜찮았다. 쓰임을 이해해 목적을 다하던 병기가 자신이 남긴 잔해를 돌아보지 못하듯. 칠십 년어치의 고통이 한 번에 몰려와 한꺼번에 앓는 동안 가끔은 전으로 돌아가게 해달라 빌었다. 그랬음에도 필사적으로 하이드라의 잔재로부터 도망친 것은 왜였을까.) 그런데 얼어 죽는 것보다는 타 죽는 게 낫겠더라고. (불에 가까이 간 나방은 죽어가면서도 비명을 남긴다. 에셋이 썩어가도 왼팔만 덩그러니 남을 것과 반대로.) 말해봐, 진실을. 지금은 아무거나 말해도 믿을게.
barnes
약속이야.
CA
(너무 오랫동안 춥게만 살아온 사람의 소회에 말없이 웃음기를 띤 채, 길게 자란 속눈썹 아래 움직임이 거의 없는 투명한 푸른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무릎이 맞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간신히 윤곽을 갖게 된 그림자를 자세히 보려는 듯. 거친 뺨과 눈가, 광대와 입매를 조심스럽게 쓸어 만지다가 이내 팔에 목을 감았다.) ……네가. (무릎이 맞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조금 더 잡아당겨 제 몸 위로 그를 완전히 겹쳤다. 젖은 장작끼리 비벼봤자 추운 겨울에 점화될 리가 없는 데도.) 너무 보고 싶었어. ……정말로 보고 싶었어. (아직도 네가 필요한가 봐. 나한테는. 입속말로 나직하게 되뇌었다.)
CA
넌 나한테 있어서 가장 소중한 사람이야. 목숨보다도.
barnes
(버키 반즈는 늘 입매가 부드럽게 올라간 채 웃음을 띤 청년이었다. 스티브는 제가 누구에게나 호감 사기 쉬운 낯이라고 말하곤 했지만 비웃음으로 읽혀 시비가 걸린 일도 많았다. 신문 읽는 사내들 아래 무릎 꿇고 구두를 닦는 일조차 마다하지 않았지만 아래를 향하는 조소에 비뚜름한 낯으로 올려다 보다 일한 값 받지 못하기도 일쑤였다. 이제는 창백하게 굳어버린 낯은 일순 녹아내려 그 웃음을 만들어낸다. 서글서글하고 보드라운 낯. 다시는 옛날 그 청년으로 돌아갈 수 없겠지만.) ...... 그래. (속삭이는 말이 누구 대사인지 지금 구별하기는 어렵겠지만. 자신인지 반즈인지, 그 둘이 정말 별개인지.) 혼자 둬서 미안해.
CA
(간신히 정체감을 분리하려 들 때마다 여실히 같은 사람인 태를 내는데, 대체 무슨 수로 구분하라는 건지. 저 역시도 그 사실을 알았기에 '다른 버전의 버키 반즈' 정도로 인지하는 중이지만. 접촉을 싫어하지 않고, 조용하지만 솔직하고, 가끔은 엉뚱한……. 어떤 면에선 버키보다 낫네. 몇 번을 보아도 질리지 않았던 미소를 보며 바닥에 놓인 일기장을 살폈다. 종이가 남는다면 언젠가 다시 그려야지.) 그래, 그러니까 다시는 혼자 두지 마. 무슨 수를 써서라도 쫓아갈 거야. 죽는다면, 찾아갈 곳이 더 쉬워지겠지. (그러고 보니 지금 몇 시간째 잠을 못 잤더라. 미세한 피로감에 눈을 감았다가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는 입꼬리를 엄지로 어루만지곤,) 넌 거짓말은 안 한다고 했지. 친구로서든, ……병사로서든. 날 따라 전장에 뛰어든 게 후회되진 않았어?
barnes
안 됐어. (이번엔 별 당연한 걸 묻냐는 듯 단번에 답할 수 있다. 반즈와 에셋의 삶이 뒤엉켜 후회를 꼽자면 여럿이지만 단 한 번도 아쉬워하지 않은 것은 로저스를 따랐단 사실이다.) 그것 아니면 잘한 게 뭐가 있다고. (하이드라의 병기가 되기 이전에도 사람 머리나 날리던 저격수였고. 핏물 질질 끌며 걸어온 길에 괜찮았던 건 단 하나 뿐이었으니까.)
barnes
...... (바람이 옷 사이로 파고들어 살을 할퀸다. 얕은 떨림이 찾아오면 몸을 천천히 일으키고.) 추워. 돌아가자. (피로에 젖은 게 눈에 훤히 보였지만 여기서 잠들게 하고 싶진 않아서. 암만 그래도 넌 여기 안 어울려. 바닥의 일기장을 집어든다. 빼곡한 페이지들 뒤로 빈칸이 서넛.) 돌아가면 널 그려줘. 사진 백 장은 필요없어.
CA
난 후회했거든. 네가 따라오게 두지 말걸. 강제로라도 밀어내야 했는데. 그도 아니라면 그때 널 따라서 뛰어내리든지. (또다시 입씨름하고 싶진 않았기에 그 이상 말을 잇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햇빛을 막아주던 단단한 가림막이 사라지고 나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진흙과 곰팡내가 옷에 스며들어 쿰쿰한 향이 밴 듯싶었지만, 그만큼 제 친구와 닮아가는 거라면 거리낄 이유도 없고.) 내 얼굴? 국방부가 그린 초상화도 있는데 새삼. (조용히 그의 팔 소매를 잡아 당기곤 앞서 계단을 타고 내려갔다. 바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걸음을 옮기다가,) 내가 그랬잖아. 네 눈동자 색. 혈청 덕분에 시력이 향상되지 않았더라면 평생 몰랐을 거라고. 제대하면 제대로 다시 그릴 거라고.
CA
……놓은 지 오래됐으니까, 열심히 연습해야겠다.
barnes
국방부가 그린 초상화를 훔쳐올 순 없잖아. 박물관 마네킹을 벗기는 것만큼 쉽지 않다고. (완전히 일어나면 눈앞이 검게 물든다. 어지러워. 무엇의 부작용인지 간간히 두통에 시달리는 것도 어깨 근육이 찢어질 듯 아픈 것도 어딘가 고장이 나긴 했겠거니.) 내 얼굴 말고 네 얼굴을 그려야 된다니까. (삐걱삐걱. 계단 소음에 묻힐 만큼 작은 목소리로 투덜댄다. 내 노트에 나를 그리다니 나르시스트 같잖아, 하며. 상대방이 혈청 맞은 슈퍼 솔져이니 다 들렸겠지만.) 여기 다시 올 일이 없겠지? (허름한 공장. 이젠 무엇을 만들던 곳인지도 모르겠지만. 여기에 두 사람 분의 음성이 울리는 게 좋았던 것 같다. 버려둬야 한다는 게 아쉬울 만큼.)
